올해 들면서 남편이 다이어트에 돌입했습니다. 재작년 불혹을 넘기면서부터 부쩍 건강관리에 신경을 쓰 |
문제는 남편이 다이어트뿐 아니라 외모에 투자하는 시간이 늘어간다는 것이었습니다. 귀밑과 앞부분에 유독 흰머리가 몰렸다며 염색을 해달라지 않나, 평소에 귀찮다고 맨 얼굴로 다니더니 화장품을 사달라지 않나, 아무래도 수상쩍은 구석이 한두 곳이 아니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남편과 대판 싸우게 되는 사건이 벌어졌습니다. 다이어트를 시작하면서 자연스럽게 술자리도 삼가고 일찍 퇴근한 남편의 손에 쇼핑백이 들려 있지 않겠어요? 모 유명백화점 이니셜이 새겨진 쇼핑백이 은근히 기대가 되는 참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안에는 남편의 봄옷이 들어있지 않겠어요? 화가 나더군요. 박봉을 쪼개 살림하느라 가뜩이나 어려운데 마누라 옷가지 한 번 못 사주면서 어떻게 자신의 옷만 달랑 사올 수 있느냐고요? 더구나 정장을 입고 출근하는 남편이 사복을 입는 날도 그리 많지 않은걸요.
잔뜩 골이 나서 퉁명스럽게 대하니 남편은 머리를 긁적이며 거래처에 들렀다가 백화점 앞을 지나는데 유행 지난 옷들을 세일하기에 두 장 샀다고 하더군요.
그러나 그 상황에서 무슨 말인들 들어오겠어요? 괜히 죄도 없는 식기를 달그락거리며 요란스럽게 설거지를 하는 것으로 화풀이를 하는 한편 부쩍 의심이 솟았습니다.
남편은 나이가 저보다 두살이나 아래입니다. 배가 조금 나오고 약간 뚱뚱하다는 것 외엔 피부도 하얗고 준수한 외모라 그럭저럭 지나는 여인들의 시선이 모아지기도 합니다. 혹시 바람이라도 난 것은 아닐까?
별의별 생각이 다 들었습니다. 한 번 의심을 품으니 남편의 일거수일투족이 죄 수상쩍고 알뜰살뜰 다이어트 뒷바라지를 하던 일조차 바보처럼 여겨지는 것이었습니다. 간혹 남편이 식사도중 음식이 짜다거나 야채식 위주로 상을 차려달라는 요구라도 할라치면 왜 그리 듣기 싫고 밉던지요?
그러던 며칠 전, 시어머님의 생신을 맞아 온 가족이 시댁으로 출발하려는 참이었습니다. 남편은 출발하기 하루 전부터 어찌나 극성인지, 염색이 채 빠지기도 전인데 극성스럽게 다시 염색을 해달라, 일전에 백화점에서 사온 옷을 번갈아 입어보며 여간 난리가 아닌 것입니다. 선이라도 보러 가는 것처럼요.
어쨌든 요즘 유행하는 블루블랙으로 염색을 하고 분홍 셔츠를 날라갈 듯 차려 입은 남편은 십 년이나 젊어진 듯했습니다. 그간의 피나는 노력 덕분에 살도 적당히 빠져 참으로 오랜만에 연애시절의 그를 대하는 듯 새롭기 그지없었지요.
남편의 변모를 가장 반기신 분은 바로 시어머니셨습니다. 어머니 연세 팔순이 멀지 않은 데다 마흔에 낳은 늦둥이가 바로 남편입니다.
더욱이 남편은 오 년 전, 죽을 고비를 넘겼지요. 스트레스로 인한 폭음으로 간이 나빠져 수술까지 받으며 생사의 고비까지 넘나들던 막내가 당신 눈에 오죽 애잔하셨을까요? 다행이 완치가 되었지만 후유증으로 흰 머리칼이 늘고 끊었던 술을 다시 마신다는 소식에 걱정이 끊이지 않던 어머니셨습니다.
아마도 지난 설에 내려온 막내아들을 보고 어머니 걱정이 이만 저만이 아니셨던 모양입니다. 어머니를 모시고 사는 큰형님으로부터 그 사실을 전해들은 남편은 굳은 결심을 한 것이지요. 그 결심을 다이어트와 금주로 실행한 것이고요.
지난 설보다 훨씬 좋아진 모습으로 어머니와 마주앉아 재롱을 떠는 남편의 모습은 초등학생 아들녀석과 별반 다르지 않습니다.
그런데 참으로 이상하게도 모자의 그런 모습이 너무도 정겹게 느껴지는 것이었습니다. 평소 마누라한테는 살가운 말 한마디 건네는 법 없는 남편인지라 조금 서운하고 질투도 나야 하는데 말입니다.
팔순의 노모와 마흔 넘은 막내아들이 바람이 솔솔 불어오는 대청마루에 앉아 정담을 나누고 있습니다. 참 아름답고 평화로운 정경입니다. 그제야 몇달 동안 남편에게 겨누었던 의심의 활시위를 슬며시 거두는 저입니다. 앞으로는 더욱 성의껏 남편의 다이어트 뒷바라지를 해야겠다는 다짐을 하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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