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주 화요일과 금요일이면 서울시립은평노인종합복지관 진료실이 노랫소리로 떠들썩해진다. 미모면 |
노래하는 진료실
“나의 살던 고향은 꽃피는 산골~”
지난 12월 21일 화요일 아침 10시, 서울시 은평구 노인종합복지관 진료실에 딸린 온돌방에서 난데없이 흥겨운 합창 소리가 들렸다. 무료 진료일에 맞춰 아침 일찍부터 진료실 앞에 줄을 섰던 환자들이 한자리에 모여 노래를 부르며 아침체조를 하시는 것. 손뼉을 치며 대여섯 곡을 이어 부르고 노래가 끝나도 열기는 식지 않는다.
1999년 개관한 은평 노인종합복지관의 역사와 함께 촉탁의로 봉사하고 있는 조남인 원장님에 대한 환자 팬들의 찬송(?)이 이어진다.
“ 원장님! 최고야! 원장님! 최고야! ” 조남인 원장님은 진료실의 ‘이효리’. 환자 팬들의 원장님 사랑이 어찌나 지극한지 톱스타 부럽지 않다.
“ 병원 운영할 때보다 봉사하는 지금이 더 좋아. 그동안 의사생활 중에 제일 행복해. 환자들이 너무 예뻐. 할머니들도 나만 보면 좋다고 내 얼굴에 뽀뽀하고 난리야. 사실 내가 더 고맙지. 나를 너무 행복하게 해주니까. 의료 인생의 마무리를 잘 하고 있는 것 같아. 이렇게 봉사할 수 있는 내가 복이 많은 것 같아. ”
가정의학 전문의로 개인병원을 운영하다 의사인 딸에게 병원을 맡기고 97년부터 의료 봉사에 나선 조 원장님. 웃음 가득한 호탕한 목소리에서 인생의 황금기를 사는 여유와 행복감이 묻어난다.
어르신 의료봉사단 멤버는 총 여섯 분이다. 조 원장님 외 정서옥, 안옥분, 이영자, 이경자, 송재희 어르신이 함께 활동하고 있다. 조 원장님이 76세, 정서옥, 안옥분 어르신이 74세, 이영자 어르신이 69세로 모두 60~70대이지만 편안히 노후를 즐기기보다 의료 봉사를 자원했다.
올해로 14년째 활동 중인 어르신 의료봉사단은 다양한 무료 진료 프로그램을 운영하고 있는 은평 노인종합복지관에서 매주 화요일과 금요일에 봉사하고 있는데 서울시에 거주하는 60세 이상 국민기초생활보장 수급자 분들을 대상으로 많게는 하루 100명 이상을 진료한다. 은평 노인종합복지관 외에도 인덕노인복지회관, 돌봄노인요양원, 녹번동, 역촌동 관련 기관 등도 방문한다.
평일 중 목요일만 빼고 오전, 오후가 봉사 스케줄로 빽빽하다. 어르신 봉사단은 평소에는 서로 ‘형님, 동생’ 하다가도 진료 시간에는 처방, 차트 작성, 주사, 조제, 혈압 측정 등 역할을 나누어‘현역’때와 다름없이 프로페셔널하게 일한다.
환자를 가족처럼 대하는 의료 봉사단
십 년 이상 매주 만나 온 가족 같은 환자들이다 보니 처방하는 약이나 영양제는 제일 좋은 것으로 쓴다. 예전에는 무료 진료라고 하면 ‘이름 없는 저가 약을 쓰는 게 아닐까’ 의심하는 환자들도 있었지만 나라의 의료복지사업에 대한 홍보가 잘 되면서 지금은 믿고 먹는다.
감기나 병이 즉각 나았다며 환자들이 고맙다는 뜻으로 기어이 찔러주고 가는 커피 값 천 원, 이천 원은 일일이 모아 연말이면 환자들을 위한 선물도 사고 간식거리도 준비한다. 어르신 봉사단은 복지관 방문이 어려운 노인들의 집으로 약을 드리러 직접 찾아가고 환자들을 위해서라면 궂은일도 마다하지 않는다.
무좀에 걸린 환자 발에 직접 약을 발라주고 노인요양원에서 봉사활동을 할 때면 변비에 걸려 고생하는 노인이 쾌변을 보시도록 옆에서 도와드리고 용변 후엔 씻겨 드리기까지 한다. 치매에 걸린 할아버지를 목욕시키는 일도 기꺼이 맡아서 한다. 모든 환자들을 내 가족처럼 여기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다.
“모든 환자 분들과 눈높이를 맞추려고 노력해요. 우리에게 진료를 받으러 오시는 분들은 연세가 많고 생활이 어려운 분들이 대부분이라 전문용어나 어려운 말을 쓰면 못 알아들으실 때가 많거든요. 가령 소변, 대변 하는 말도 모르는 분들이 계셔서 똥, 오줌이라고 해야 해요. 표준어로 부추를 전라도 지방에서는 솔, 경상도에서는 정구지라고 하는 식으로 환자 개개인이 가장 이해하기 쉬운 말로 대화하려고 노력해요.”
서울시 간호직 공무원으로 보건소 등에서 38년 동안 근무하다 98년 퇴직한 정서옥 어르신의 말이다. 환자를 진심으로 대하려는 어르신의 마음이 느껴진다.
서독병원(옛 시립 서대문병원) 등에서 수간호사로 근무하다 정서옥 어르신과 같은 해 퇴직한 후 나란히 의료 봉사의 길로 들어선 안옥분 어르신도 자신의 몸을 아끼지 않는 의료인이다. 80년대 결핵, 장티푸스 등이유행하던 시절, 모든 간호사가 마스크를 낀 채 근무하는데도 수간호사로서 차마 마스크를 낀 채 환자를 대할수가 없어 당신 자신이 결핵에 걸려 1년 반을 고생한 적도 있다.
옛 내무부장관 표창, 서울시장 표창 등 각종 상도 많이 받으신 두 분은 주변인들에게 의료 봉사의 즐거움과 필요성을 홍보하며 ‘의료 봉사 홍보대사’ 를 자처한다. 두 분은 한목소리로 “ 더 많은 은퇴 의료인들이 의료 봉사에 나섰으면 좋겠다 ” 고 말했다.
가장 멋진 노후
어르신 봉사단은 한 사람이 그만두면 다 같이 그만두기로 해서 아무도 그만하겠다는 말을 못 꺼낸다고 한다. 이영자 어르신은 나이가 들면서 점점 몸이 힘들어지는 건 사실이지만 꾸준히 봉사활동을 하겠다고 스스로 다짐한다.
“ 처음에는 내가 얼마나 이 일을 하려나 싶었는데 이제는 정이 들어서 내 일이라 생각하며 하고 있지. 우리 어머니가 중풍으로 쓰러지시고 일찍 돌아가셔서 아픈 노인 분들을 보면 어머니 생각이 많이 나. 우리 남편도 체력이 허락하는 한 봉사 활동 열심히 하라고 격려해주면서 집안 일까지도와줘. 남에게 봉사하다 보면 내가 더 행복하고 배우는 것도 많아. ”
평균 수명 80세의 노령화 시대. 60세 정년이면 은퇴 후에도 20여 년을 더 살아가야 한다. 자신의 전공을 살려 어려운 이웃을 위해 헌신하는 일만큼 멋진 노후가 또 있을까. 의료봉사단 어르신들을 본받아야 할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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