를 엮어 출판된 "가난한 지구촌 사람들을 사랑한 한국의 슈바이처들"의 내용으로, 발간 주체인 한국국제협력단(KOICA)의 동의를
얻어 건강천사에서 금요특집으로 소개드립니다. 읽는 모든이와 자라나는 청소년에게 감동과 삶에 귀감이 되길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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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재성은 중학교 때 마하트마 간디의 《진리를 찾아서》와 슈바이처의 《생명의 외경》같은 책을 읽고, 자신에게도 기회가 주어진다면 그런 일을 해보고 싶었습니다. 의대에 진학하면서 사람이 살면서 특이한 환경에서 남을 도울 수 있는 이런저런 일을 해볼 수 있다면 짧은 인생에서 의미 있는 일이라 생각하였습니다.
그는 1955년에 태어나, 1974년 한양대학교 원자력공학과를 다니다 군제대 후 1978년부터 전북대학교 의대에서 공부하였습니다. 1988년 인제대학교 서울백병원에서 내과전문의를 취득하였고, 1990년까지 수원제일병원에서 내과과장으로 재직하다가, 그 후 수원에서 내과의원을 개원하였습니다.
의사 최재성은 KOICA(한국국제협력단)의 정부파견의사 공고를 보고 지원했습니다.
개원하고 있던 의원을 처리하는 것도 쉽지 않았습니다. 특히 집안이 모두 월남가족이었고, 이모가 자식 없이 혼자 사는 관계로 어머니가 돌아가시면서 이모를 모시라는 유언을 하였기 때문에 이모를 설득하는 것도 쉽지 않았습니다. 2001년부터 2005년까지 미얀마(Myanmar) 양곤병원(Yangon General Hospital) 내과(Liver unit)에서 근무하였습니다.
의사 최재성의 진료모습
버마였던 미얀마.
수도 양곤 시가지 북쪽 언덕 위에는 1453년에 세워진 둘레 426m의 광대한 정사각형 기단 위에 높이 100m의 쉐다곤 파고다가 황금색으로 찬연히 빛나는 불교의 나라. 영국과 전쟁을 수차례 벌였던 용감한 나라.
미얀마는 그의 어린 시절 사회 환경과 유사하였습니다. 의료 환경도 낙후하여, 1960년대 초반의 한국을 보는 것 같았습니다.
미얀마는 그들의 언어를 가지고 있었으나, 영국식민지이었던 까닭에 의사들이 영어를 잘하여 의사소통에는 문제가 없었습니다.
사회주의 군사독재체제이며, 폐쇄적인 사회로 감시가 철저했는데, 병원에서 접촉하는 의사 이외의 다른 사람들을 마음대로 만날 수 없는 상황이었습니다. 개별 진료는 절대로 허용되지 않았고 병원에서 지정해주는 업무만 맡아서 해야만 했습니다.
미얀마의 여름은 보통 섭씨 45도를 오르내리는 찜통이었는데, 그가 근무한 병원은 100년 이상 된 건물로 에어컨도 없는 열악한 상황이었습니다. 너무 더워 외부의 열기가 몸 안으로 들어올 정도였습니다.
미얀마의 모든 지역에는 전기가 24시간 공급되지 않았고, 전기가 몇 시간 동안 공급되는 지역인지에 따라 월세가 확연히 달랐습니다. 저녁시간에 저녁을 먹고서는 모기나 해충이 많아서 산책이나 외출할 마땅한 곳이 없어 집에서 주로 생활을 해야 하는 불편이 있었습니다.
밖에서 음식 사먹을 곳이 없고, 사먹을 돈도 없으므로 대부분의 미얀마 의사들은 도시락을 싸가지고 다닙니다.
점심시간에는 옹기종기 모여 도시락을 펼쳐놓는데, 자신의 가장 좋은 반찬을 돌리며 상대방에게 나눠주는 것을 예절로 아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들의 반찬에는 진한 향신료가 있어 맛을 즐긴다기보다는 그냥 삼켜야 했습니다.
그들의 호의를 생각하여 즐거운 마음으로 식사를 마치지만, 그곳의 음식은 정부파견의사 임무를 마칠 때까지 익숙하지 않았습니다.
미얀마의 국립병원은 돈이 없는 극빈층의 사람들이 오는 곳이었습니다.
영국에서 교육을 받은 유능한 의사들이 많았지만, 하루 벌어 하루를 근근이 보내야 하는 사람들에게 약값 등은 너무 버거웠습니다. 수술은 무료지만 마취약, 항생제, 진통제 등은 환자가 구입해야 하는데, 약값이 보통 한달 월급이상의 비용이므로 환자가 약을 구입하지 못하는 안타까운 경우가 많았습니다.
의사 최재성이 병상의 환자를 돌보고 있다
어떤 의사가 그를 찾아와 수술 받은 환자가 항생제를 살 형편이 못되니 약을 달라고 해서 예비로 비축한 주사제를 주었던 적도 있었습니다. 경제적 여유가 있는 사람들은 민간병원으로 가서 진료를 받았는데, 국립병원의 의사들이 따로 예약 받아 순회하면서 진료하는 시스템이었습니다.
한국의 서울대학병원 같은 양곤병원에서 미얀마 의사와의 협진은 환자들에게 그저 상징적 의미였습니다. 오히려 수련중인 의대생들에게 선진화된 한국의 의료강의를 통해 공감대를 나눌 수 있었습니다.
그는 일반적인 의료 활동으로 후진국을 지원하는 시대는 지났다고 생각하였습니다.
미얀마는 영국식 의료시스템이라 의료수가가 너무 비싼 현대식 의료에 목맨 형국이었습니다.
위내시경을 할 수 있는 병원이 전국에 고작 몇 군데 뿐이었고, 돈이 많은 사람들은 민간병원을 이용하였지만, 돈이 없는 사람들에게는 의료시설은 허울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미얀마의 경제력이 감당할 수 있는 값싸고 효과 좋은 침술과 근신경자극요법(IMNS)이나 일종의 에너지요법인 동종요법(Homeopathy) 같은 좀 더 특화된 영역의 의료를 지원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판단하였습니다.
전통적 불교국가인 미얀마에도 한국에서 온 선교사가 많았습니다. 선교사들을 보면 별로 하는 일이 없는 것 같았습니다. 그러나 그 역시 시간이 지나면서 미얀마 주민들과 그냥 같이 사는 것이 그렇게 쉬운 일이 아니구나 하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그들과 친숙하게 지내는 것이 그들에 대한 봉사요 국제협력이라고 그는 말하였습니다.
정부파견의사 임무가 끝나던 2005년 새해. 쓰나미가 남아시아를 휩쓸었습니다.
미얀마의 이웃 나라인 태국에도 쓰나미가 밀려왔고, 태국 푸켓 위에 난민수용소가 있는 팡아주의 초등학교에서 서울에서 온 10여 명의 봉사단원과 난민들을 치료하며 뜻 깊은 시간을 보냈습니다.
무차별 폭격을 맞은 것 같은 처참한 그곳에서 2주일 동안 다친 그들을 치료하며 인생의 의미와 감사를 배울 수 있었습니다. 열악한 환경이었지만, 야전침대에서 잠을 자며 그는 최선을 다하였습니다.
의사 최재성이 KOICA에 보고한 문서를 종합하면, 3개월마다 외래 환자 297명, 입원 환자 371명, 내시경 진료 307명, 초음파 진료 62명 그리고 동포 진료 131명 정도를 담당하였습니다. 미얀마에는 한국인이 1,000명 정도 있었고, 동포를 위한 클리닉에서 진료하였습니다.
그리고 한국의 대외경제협력기금인 EDCF(Economic Development Cooperation Fund)차관으로 건립중인 B형 간염 백신 공장이 진척됨에 따라 미얀마 보건부의 기대도 높아졌습니다. 그는 의학연구단체인 DMR(Department of Medical Research)를 조직하여 간염백신의 임상실험인 Clinical Trial(백신적응도 항체 생성률 및 합병증 발생률)을 DMR과 함께 공동 연구하였습니다. 미얀마 보건부의 백신 전문가 홍보 프로그램의 일종 인 B형간염백신 회의에 정책적인 도움을 주었습니다.
그는 미얀마에서의 정부파견의사 임무를 마치고 귀국하여 다음과 같은 제의를 합니다.
후진국에 정부파견의사를 파견하여 보다 많은 환자를 치료하는 것도 중요하나, 그 나라의 보건정책에 참가하여 예방의학적 접근을 하는 것도 중요하다. 물론 WHO(세계보건기구)나 UNICEF(유엔아동기금)에서 이런 일에 관여하나, 이 단체에서는 알 수가 없는 소위 중간급 병원에서의 관습적으로 행해지는 약 투여와 진단 그리고 시술행위의 경우 많은 허점을 지니고 있다.
이런 것의 시정은 환자를 몇 명 더 진료하는 것보다 중요한 의미를 가지고 있다. 이런 문제에 대한 각 나라의 국제협력단 파견의사의 경험을 공유할 필요가 있다.
양곤병원의 간장학(Hepatology) 분야에서 환자 상담치료외의 본인이 담당하고 있는 일 중에는 치료내시경이 있는데, 미얀마 인구의 20~30% 가 간염환자이고 이중 상당수가 간경화나 간암으로 진행된다. 소위 간경화로 인한 식도 위출혈 환자를 내시경적 혈관치료를 통해 지혈하는 것이다.
미얀마에서는 치료내시경의 수련병원이 없으므로 본인이 이 부분을 담당했고 내과 수련의에 대한 교육을 하려고 여러 가지 노력을
했으나 내시경자체가 없고 지혈소모품이 없는데 무슨 배울 의욕이 있겠는가. 결론으로 각 지역 사정에 맞는 의료 시스템 적응이 필요하다는 결론에 도달했다.
즉, 지역사정에 맡는 의료와 현대적인 의료시스템의 통합이 시급하다.
그리고 최근에 KOICA에서 정부파견의사와 태권도사범 등 전문가 파견을 없애고, 병역면제 조건으로 파견하는 협력의사제도는 보편적인 진실을 이해하지 못한 결과라 생각된다. 일본의 대사관의사나 JICA(일본국제협력기구)의 정부파견의사 제도를 연구해 볼 필요가 있다.
의사 최재성은 미얀마에서의 4년간의 정부파견의사 임무를 성공적으로 마쳤습니다.
귀국 후 한동안 너무 많이 달라진 한국의 사회와 의료시스템에 적응하는데 홍역을 치루기도 했지만 현재는 인천 나사렛 국제병원에서 내과 원장으로 재직하고 있습니다.
미얀마에서의 국제협력단의사의 경험을 토대로 은퇴 후 개인적인 후진국 진출과 봉사도 부담 없이 계획하고 수행할 자신감도 생겼습니다. 즉, 후진국에 꼭 필요한 침술과 근신경자극요법 그리고 동종요법 같은 돈이 들지 않는 의료를 수행할 현지 의료인력 교육과 의료시스템의 개선을 위한 프로젝트입니다.
그는 병든 불쌍한 환자를 찾아가 치료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병원의료체계의 제도개선이 보다 효과적이라 생각하였습니다. 그리고 진정한 생명외경의 정신으로 미얀마 주민과 친숙하게 잘 지내는 것이 봉사이고 협력이라 여겼습니다.
출처 가난한 지구촌 사람들을 사랑한 한국의 슈바이처들 / 한국국제협력단(KOIC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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