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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통/나눔&봉사

[금요특집] 한국의 슈바이처들....제16부 이용만(방글라데시)



이하 글은 
아프리카 오지로 머나먼 남미의 산골로 젊은 시절을 온통 다바쳐 인류애를 실천하신 정부파견 의사분들의 감동적인 이야기

를 엮어 출판된 
"가난한 지구촌 사람들을 사랑한 한국의 슈바이처들"
내용으로, 발간 주체인 한국국제협력단(KOICA)의 동의를
 
얻어 건강천사에서 금요특집으로 소개드립니다.
 읽는 모든이와 자라나는 청소년에게 감동과 삶에 귀감이 되길 기원합니다.

 

 

  방글라데시의 슈바이처  이용만

  즐겁지 않으면 이일을 못한다.

 

 

 

 

 

 

 1992년 겨울. 아내와 함께 퇴근하던 의사 이용만은 반포대교를 건너면서 폭탄선언을 했습니다.

 해외에서 봉사의 삶을 살고 싶다....
 아내는 흔쾌히 동의했습니다.  

  

 

 로마의 케사르가 루비콘 강을 건넜듯이 한국의 이용만은 운명의 주사위를 던진 셈이었습니다.

 

 1993년 겨울. 그는 KOICA(한국국제협력단) 정부파견의사의 자격으로 방글라데시(Bangladesh)로 갔습니다. 부부는 한국을 떠날 때, 자녀들이 살던 아파트 한 채만 남겨놓고 모든 재산을 처분했습니다. 마치 한국으로 돌아올 생각을 않겠다는 배수진이었습니다. 1945년 해방둥이였으니, 하늘의 명령을 안다는 50을 바라보는 나이였습니다.


 이용만은 조선대학교 의대를 졸업하고, 고려대학교 의과대학에서 학업을 마쳤습니다. 서울에서 병원을 개원하면서 나름대로 보람 있고 편안한 생활을 하였습니다. 그런데 그는 의사가 되면 신앙인으로서 봉사하는 기회를 반드시 갖겠다고 서원했던 대학시절의 각오가 항상 마음에 남아있었습니다.

 

 정부파견의사로 파견되기 전에 그는 내심 사전 준비를 하고 있었습니다. 방글라데시를 두 차례 방문했는데, 이 사실을 알게 된 누나가 여행경험에 대하여 묻자 찍은 사진을 보여 주었습니다. 그런데 뜻밖의 인물이 사진 속에 있었습니다.

 

미국인 선교사 카딩턴 박사였습니다.

 그는 한국전쟁직후 혼란기에 자궁외 임신에 의한 심한 출혈로 죽음을 기다리고 있던 상황에서 수술을 해 누나를 살린 생명의 은인이었습니다. 그는 임기를 마치고 귀국하여 연락이 끊어져 생사조차 몰랐는데 그 고마운 카딩턴 박사를 의사 이용만이 방글라데시 여행 중에 같이 사진을 찍게 되어 누나에게 소식이 전해졌던 것입니다. 운명이란 것이 그를 이끌었던 모양입니다.

 

 

 방글라데시 수도 다카 근교 통기병원 내과에서 그는 인술을 펼쳤습니다.

 

 외국인 의사에 대한 현지 의료인들의 배타적인 상황에서 성공적인 활동을 하였으며, 일과 후에는 교민들을 위한 예방접종 및 각종 상담에 응하였습니다. 그가 KOICA에 알린 실적보고서에는 무려 40여 종에 달하는 질병을 진료하였으며, 매 분기마다 3,000명에 가까운 환자를 만났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방글라데시는 이슬람국가이기 때문에 환자를 진찰할 때 옷을 입은 채로 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한동안은 어려움을 겪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의 다정한 인술은 꽃을 피웠고, 그의 병실에는 환자들이 끊이지 않았습니다.

진료 시작은 아침 9시인데 7시부터 기다리고 있었고, 바쁜 일정을 소화하다보면 화장실 갈 시간도 없을 정도였습니다.

환자들도 오래 기다리다 보면 화장실에 가야 함에도 불구하고 새치기를 당할까 봐 참고 기다리다가 병실에서 실례를 하는 경우까지 생겼습니다.

 

 의사 이용만이 묵묵히 진료하던 중에 언제부터인가 여자 환자들이 대다수를 이루는 상황이 전개되었습니다.

 그 이유를 곰곰이 생각해 보니 일부다처제 아래서 여성들이 겪는 스트레스와 고민에 대해 귀를 기울여주다 보니 큰 위안을 받았기 때문이었습니다.

 

 방글라데시에서 근무한 지 3개월이 지난 무렵, 병원 복도에 누워 있는 세 살가량의 아이를 발견하였습니다.

 버려진 아이였고, 한눈에 보기에도 영양실조였습니다.  

 아이를 병실로 옮기고, 우유와 햄 그리고 빵을 사다가 옆 침대의 여인에게 먹여줄 것을 부탁했습니다.

일주일 쯤 지나 아이를 찾아가 상태를 보니 전혀 나아지지 않았습니다. 알고 보니 그 부인이 아이에 게 줄 음식을 먹었던 것입니다.

 

 당황한 그는 직접 아이에게 음식을 주기 시작했고, 한 달가량 지나면서 아이가 뚜렷하게 건강을 회복하였으며, 주변에서는 아이를 양녀로 삼을 것을 권유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법적으로 불가능했습니다.

 몇 달이 지나 한 고위공무원이 입양하겠다며 그의 의향을 물어와 아이의 장래를 위해 흔쾌히 수락했습니다.

 훗날 양부모와 함께 가끔 병원을 방문한 그 아이는 공주처럼 변해 있었습니다. 그는 큰 보람을 느꼈습니다

 

 

 

 3년을 근무한 후 방글라데시 정부로부터 비자연장을 받지 못해 네팔(Nepal)로 옮기게 되었습니다.

 

그가 네팔정부로부터 지정받은 국립 박따뿔(Bhaktapur)병원은 어쩌면 본격적인 봉사와 희생의 마당이었습니다.

네팔은 비록 후진국이지만 국가가 보건예산을 전체 예산의 7%를 배정할 정도로 큰 관심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네팔의대에서 배출되는 의사들의 사회적 지위는 매우 높았습니다.

 

 네팔 사회에서 의사들은 가장 우수한 인재로 간주되며, 경제적으로 넉넉하고 권력층과 연결된 집안 출신들이 대부분이었습니다.

 그리고 의과대학 학자금은 너무 비싸고, 가난한 집 출신들은 장학금 수혜가 많지 않은 여건에서 공부를 하였기 때문에 엘리트의식
과 자존심이 강하였습니다.

 어쩌면 신성한 인술을 펼치는 의사들이 이미 폐지된 카스트 제도의 영향을 받고 있는 것처럼 보였습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외국인 의사에 대해 차별적이었고, 병원의 환경은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참담하였습니다.

 새로운 병동도 지어졌고 KOICA의 지원으로 시설도 개선되었지만, 그가 진료를 처음 시작할 때만 해도 분만을 하기에는 너무 시설이 열악하여 산모와 신생아 모두에게 위험해 보였고, 진료 중에 정전도 잦았습니다.
 히말라야 산맥의 작은 나라 네팔에서는 병이 생기면 무속인, 민간요법, 시골 약국이나 보건소 그리고 마지막으로 병원을 찾았습니다.

 

 70대 할머니의 종양을 제거한 수술은 하나의 전설적 사건으로 기록되고 있습니다.
 배가 산처럼 솟은 노인을 초음파로 진단해보니 커다란 물혹이 자리 잡고 있었습니다. 수술을 권유했지만 ‘70이 넘은 내가 얼마나 더 살겠다고 수술하겠느냐’며 거부하는 환자를 설득해서 18Kg이나 되는 종양을 들어냈습니다.

 수술 받은 후 퇴원했다가 세 손녀와 함께 그를 찾아와 이제는 살 맛이 난다고 고마워하였습니다.

 이 환자가 수술 받은 후 의료진과 함께 찍은 사진과 들어낸 물혹 사진은 지금도 그 병원에 걸려 있습니다.

 

 의사가 부족하다 보니 자신의 전문분야가 아닌 수술을 감행한 적도 있습니다.

 한번은 응급실로 환자가 들어왔는데 유방염이었습니다. 응급실의사는 환자를 카트만두 시내에 있는 병원으로 이송하자고 제안했지만, 그가 만류했습니다. 수술을 성공적으로 마치자 산부인과과장은 그를 유방농양치료전문가(Breast Abscess Specialist)라 부르면서 부러워하였습니다.

 

네팔에서는 남자들이 또삐를 머리에 쓰고 다니는데, 오직 또삐만을 만들어 살아가는 환자가 선물한 것을 그도 쓰고 다녔습니다.

처음에는 환자들이 보통 높이보다 두 배 정도 높은 것을 주면서 당신은 반드시 이걸 써야한다고 해서 영문을 몰랐는데 알고 보니 그것은 상류층이 쓰는 것이었습니다. 그렇지만 그는 이를 극구사양하고 보통 사람들이 쓰고 다니는 낮은 또삐를 쓰고 다녀 더욱 큰 존경을 받았습니다.

 2003년은 박따뿔병원 개원 100주년이었습니다.

 

 네팔 왕실은 의사 이용만에게 각별한 인사말을 담아 감사패를 전달하면서, 그의 헌신적인 의료활동을 치하하였습니다.
 이용만은 KOICA의 전적인 지원을 받아 2009년에 개원한 한국·네팔 친선병원에서 활동하였습니다.

 박따뿔병원에서 진료 받던 환자가 멀리 떨어진 이 병원까지 그를 찾아오는 경우가 적지 않았습니다.

 

 

 

 남편이 노래를 하면 아내도 따라서 부른다고 했던가요. 이용만의 부인 박영례도 묵묵히 남편을 돕다가 봉사에 나섰습니다.


 2002년, 2층짜리 주택을 임대해 고아원 ‘시온의 집’을 열었습니다. 부모가 없거나 결손가장 출신이며 교육을 받을 수 없는 원거리 시골출신 아이 12명을 자식으로 받아들였습니다.

 못 먹고 못 배우던 아이들이 달라졌습니다. 그들은 회계사와 의사 등의 꿈을 키웠습니다. 그들은 이용만 의사 부부가 없었다면 학교에 가지도 못하였을 것이니, 자신들의 인생이 완전히바뀌었다고 말했습니다.

 

 특히 ‘시온의 집’ 어린이를 지도하다가 의과대학에 합격한 시골청년에게 이용만 부부는 입학금부터 졸업할 때까지 학업에 필요한 모든 비용을 후원하였습니다. 그 가난했던 청년은 의대를 졸업하고 한국에서 6개월 동안 연수도 받았습니다. 그리고 현재 의사가 부족한 시골 주민들을 위하여 일하고 있으며, 이용만 부부를 아버지 어머니라 부르고 있습니다

의사 이용만과 네팔인 양아들    

  

 그가 방글라데시로 가던 해 집안에는 고등학교 3학년인 대학입시생이 있었습니다.

 3남매를 남겨두고 부인과 늦둥이인 막내만을 데리고 떠났습니다. 어찌 보면 자식에게는 무심한 부모였습니다.

 이용만은 지금도 20년 전 양복을 입고 다녀서 주위에서는 유니폼이라고 합니다.  아내는 둘째 셋째 딸 결혼식에 친구와 시댁 조카 한복을 빌려 입었습니다.  그들 부부는 물질적으로 가난하지만 마음으로는 누구도 부럽지 않은 부자였습니다.

 

 그는 2000년 적십자 박애상 금상, 2005년 KOICA 표창 그리고 2008년 외교통상부가 후원하고 KOICA와 KCOC(한국해외원조단체협의회)가 공동 주최하는 대한민국 해외봉사상 대통령상을 수상하였습니다.
 2008년 KOICA에서 거행된 제3회 대한민국 해외봉사상 대통령표창을 수상하면서 그는 소감을 이렇게 말했습니다.

 남들에게 알려지지 않고 말없이 열심히 봉사활동을 한 사람들에게 죄송하고 부끄럽다.

 의사 이용만의 자랑스런 해외봉사 이야기는초등학교 6학년 2학기 사회교과서에 실려 있습니다.

 

 20년 세월.

 즐겁지 않으면, 이 일을 못한다고 그는 겸손하게 말합니다.

 

 

출처  가난한 지구촌 사람들을 사랑한 한국의 슈바이처들 / 한국국제협력단(KOIC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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