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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통/나눔&봉사

[금요특집] 한국의 슈바이처들....제14부 이상호(스리랑카)

 

이하 글은  아프리카 오지로 머나먼 남미의 산골로 젊은 시절을 온통 다바쳐 인류애를 실천하신 정부파견 의사분들의 감동적인 이야기를 엮어 출판된 "가난한 지구촌 사람들을 사랑한 한국의 슈바이처들" 내용을, 발간 주체인 한국국제협력단(KOICA)의 동의를 얻어 건강천사에서 금요특집으로 소개해 드립니다. 읽는 모든이와 자라나는 청소년에게 감동과 삶에 귀감이 되길 기원합니다.

 



 

   스리랑카의 허준  이상호

   아름다운 촛불

 

 

 

 

 

 

 

 

 

  보우머 이쓰뚜띠, 마터 고닥 싼또레이

(고맙습니다. 선생님은 내게 행복을 가져다 주었습니다.)

 

스리랑카(Sri Lanka) 사람들이 그에게 전하는 영원한 인사말입니다.
자기가 가진 재능으로 남에게 도움을 주려는 사람이 많아질수록 더 아름다운 세상이 될 것이라 말하고, 저 세상으로 훌쩍 떠난 그는 한국과 스리랑카에서 오래도록 기억될 것입니다.

 

한의사 이상호.

1968년에 태어나, KOICA(한국국제협력단) 정부파견한의사로 인술을 펼치다가 2004년 7월 8일 새벽 스리랑카 북동부 지역 트링코말리에서 심장마비를 일으켰습니다.

 

의료 환경이 열악한 그곳에서 하루 100~200여 명 에 달하는 환자들을 보살피느라 누적된 피로가 뼈아픈 요인이었습니다.
그는 경희대학교 한의학과에서 공부를 마치고, 2003년 스리랑카 콜롬보의 보렐라 교육병원에 정부파견한의사로 파견되었습니다. 그리고 심장마비로 순직하였으니, 1년 3개월간 그의 꿈을 뜨겁게 펼친 셈이었습니다.

 

이 슬픈 소식이 매스컴을 탔을 때, 국민들은 그의 죽음을 안타까워하면서도, 그 아름다운 행적을 깊이 새겼습니다.
한의대 본과 시절, 다일공동체에서 한의사인 아내 황경선과 함께 주말 의료봉사를 했습니다.

젊고 촉망받는 재활의학과 전문의 시절, 학교에 남아달라는 부탁이 이어졌지만 그의 열정은 누구보다도 뜨거웠습니다.

 

2001년 KOMSTA(대한한방해외의료봉사단) 단원으로 스리랑카에 첫발을 내디뎠습니다.

날씨는 더웠고 몸은 피곤했지만 당시의 감동은 여느 때의 봉사활동에서 느꼈던 것 이상이었습니다.

2002년 다시 스리랑카에 왔을 때, 그곳 사람들에게 한의학으로 도움을 줄 수 있다면 자기 인생에 큰 보람이 될 것이라 생각하고,

그는 정부파견한의사에 지원했습니다.

 

 

 

 

  다음은 정부파견한의사 지원 동기서의 내용입니다.

 

 

 

적지 않은 사람들이 자기가 가진 재능을 통해 남에게 도움을 주고 싶어한다.

이런 사람들이 많아진다면 우리가 사는 세상은 지금보다 훨씬 더 아름다운 세상이 되리라 확신한다.

 

나와 나의 아내는 한의사이다.

의료는 다른 직종에 비해 그 특성상 공익성이 두드러지는 직업이고 직종이다.

이런 생각 때문에 학창시절부터 의료봉사에 관심이 있었고, 본과 3~4학년 때는 다일공동체(청량리소재)에서 지금의 아내와 함께 주말 무료봉사를 했었다.  우연치 않은 기회에 경희의료원 한방재활의학과 레지던트 2년차 때(2000년 11월), KOMSTA의 일원으로 스리랑카로 해외의료봉사를 가게 되었다.

 

날씨는 더웠고, 피곤한 몸으로 많은 환자를 보았지만, 잠시 스쳐가는 일회성 봉사의 아쉬움이 남았지만, 그때의 감동은 여느 때의 봉사에서 느꼈던 것 이상이었다. 이듬해 다시 한 번 스리랑카로 봉사를 갈 수 있는 기회가 되어 해외의료봉사를 다녀왔으며, 나는 2번의 스리랑카 의료봉사를 통해 이곳에서 내가 가진 의술, 한국이 한의학으로 이들에 도움을 줄 수 있다면 개인적으로는 인생의 큰 보람이며 아울러 영광이 될 것이란 확신이 들었다.

 

의료봉사를 통해 대한민국의 위상을 높이고 한국한의학을 세계화시킨다는 것은 가슴을 설레게 하는 것이었다.

 

나는 지금도 내가 배우고 익힌 의학지식이 나와 나의 가족만을 위해서 사용되어서는 안 된다는 생각을 갖고 있다.

(그것이 의학적인 도움이든 그것을 통해 경제적인 이익을 얻는 것이든지 간에……)

 

아내와 함께 고민하며 결정한 것이 있다. 그것을 지킬 수 있을지는 지금도 확신할 수 없다.

그것은 60세 이후부터는 full time으로 의학적인 지식과 기술을 어려운 이웃을 위해 베풀며 살자는 것이다.

나는 지금 그시기를 조금 앞당겨 보고 싶다.

 

그리고 지금 당장 이웃을 위해 살지 못한다면, 나이가 들면 들수록 더 쉽지 않을 것이란 생각이 들었다.

 

조금이라도 젊었을 때, 남에게 도움이 되는 삶을 한번 살아 보자는 것이 지금 나와 나의 아내의 공통된 생각이다.

그때를 기다리며 스리랑카 정부파견한의사에 지원한다.


대학에 남아 한의학 이론을 세워 존경 받는 교수가 되어도, 한의원을 개원하여 이웃을 도우면서 명예를 쌓아도 될 터인데, 그는 자신을 태워 주위 를 밝히는 촛불 같은 모습으로 자신의 길을 찾았습니다.의서 《의방유취醫方類聚》에서 강조하는 ‘환자를 측은히 여기는 마음을 갖는다.는 인술을 태생적으로 갖춘 아름다운 한의사 이상호였습니다.

 

 

  그는 늘 자신을 이렇게 다독였습니다.

 

배우고 익힌 의학지식이 나와 내 가족만을 위해 사용돼서는 안 되며, 조금이라도 젊었을 때 이웃을 위해 베풀며 살고 싶다.    가난한 자가 가장 서러울 때는 제대로 의료 혜택을 받지 못할 때이다.

 

그는 스리랑카의 전통의학을 존중하는 아유르베딕(Ayurvedic) 교육병원에서 근무하였습니다.

우리나라 대학부속 종합병원 같은 곳입니다. 곳에서 진료실 설치, 진료 등 모든 일을 도맡아 해나갔습니다.

그리고 아유르베딕 의사들에게 한의학을 가르치고 병원에 개설된 Korea Clinic에서 현지인들을 대상으로 진료활동을 하였습니다.

 

경혈침구학 기본과정을 만들어 1기생 10명을 배출했으며, 2기생 18명을 가르쳤습니다.
그곳에서 구하기 힘든 약재들이 많았으나, 홀로 돌아다니며 구했습니다.

섭씨 30도를 오르내리는 무더위도 참기 힘들었고, 불규칙한 전력공급에다가 의료기기도 지원받기 어려웠습니다.

 

그러나 늘 환하게 웃었습니다. 자녀교육에도 빠듯한 월급이지만, 아내 그리고 1남 1녀의 자녀와 너무나 행복하게 지냈습니다.

주위에서는 뭔가 이룩하려 하지 않고 하나하나 채워나가는 사람이다 라고... 그를 그렇게 기억했습니다.

2005년 제33회 보건의 날을 맞아 대한민국 정부는 그에게 국민훈장 석류장을 추서했습니다.

신앙인이었던 그는 훈장을 받으며 생전에 하던 말 처럼 이렇게 말하였을 것입니다.

 

"내가 선택한 것은 봉사가 아닙니다. 그냥 삶입니다. 나를 낮추기만 하면 정말 행복해 질 수 있습니다. "

 

 

 

출처  가난한 지구촌 사람들을 사랑한 한국의 슈바이처들 / 한국국제협력단(KOIC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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