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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TV&영화 속 건강

'실력있는 의사' vs '따뜻한 의사'


 

  “열심히 연구해서 환자를 치료할 실력을 갖춘 의사보다 유별난 봉사 정신으로 환자에게 과잉 친절을 베푸는 의사가 더

 훌륭한 것처럼 여겨지고 있으니….”   이렇게 개탄하는 신경외과 의사 이강훈.

 그는 현재 방영 중인  KBS 2TV의 의학 드라마 ‘브레인’의 주인공이다. 

 국내 최초로 뇌과학을 소재로 한 드라마로 총 20부작 예정으로 현재 중반에 접어들었다.  

  월, 화요일의 동일한 시간대에 방영 중인 SBS 드라마 ‘천년의 약속’이 이미 인기를 끌고 있는 상태에서 뒤늦게 경쟁에

 나섰다. 대진운이 좋지 않은 셈이지만, 꾸준히 시청률이 오르고 있어서 ‘의학 드라마 불패 신화’를 재현할 지 주목되고 있다.

 

 

 

 

 드라마 ‘브레인’의 주인공 이강훈...

 

 ‘브레인’의 주인공 이강훈은 실력이 출중하지만 차가운 성격으로 자신의 성공에 집착한다는 점에서 2007년에 방영돼 화제를 모았던 MBC ‘하얀거탑’의 장준혁을 연상시킨다.

 

 배우 김명민이 연기했던 장준혁은 대학병원 일반 외과의 부교수로서, 간담도계암 및 췌장이식 수술로 명성이 높다.

 자신의 실력을 과신하는 그는 늘 오만한 태도로 동료들을 대한다.

 환자를 치료하는 데 기쁨을 느끼기보다는 새로운 질환을 발견해서 그것을 정복했다는 인정을 받는 것에 더 보람을 느낀다.

  그는 병원 내의 출세를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다. 그 이면에는 가난한 집안 형편 탓에 자신을 위해 희생한 어머니와 가족들에 대한 연민과 애처로움이 자리하고 있다. 

 

 신하균이 연기하고 있는 ‘브레인’의 이강훈도 명문대인 모교의 병원에서 누구보다 수술 실력을 인정받고 있는 전임의 2년차다.

 자신의 실력에 대한 자만심이 하늘을 찌른다는 점에서 장준혁의 닮은꼴이다.

 

 어렸을 때 아버지를 잃고 어려운 가정환경에서 자란 그 역시 성공에 대한 야망에 사로잡혀 있다.
 이강훈은 어머니와 여동생에게 돈을 대주기는 하지만, 마음을 열고 따뜻하게 정을 주지는 않는다.

 모든 것을 혼자 힘으로 헤쳐 온 그에게 가족이라는 존재는 자신의 성공에 걸림돌일 뿐이다.

 그런 점에서는 이강훈은 장준혁보다 더 냉정한 캐릭터인 셈이다.

 

 

 이강훈 역을 맡은 신하균은 영화 쪽에서 활발하게 활동해 왔으나 드라마에는 드물게 출연해왔다.  그래서인지 ‘브레인’에서 감정의 발산이 과잉된 듯한 느낌을 준다. ‘하얀 거탑’의 김명민은 폭발적인 감정 표현을 하면서도 절제의 내공을 보여줬다. 
 신하균의 ‘오버’가 덜 어색한 것은 드라마 내 신경외과의 상황이 워낙 긴박하기 때문이다.

 민감한 1.4kg의 뇌를 다루는 의사들의 모습은 절로 긴장감을 자아낸다. 뇌를 접사 촬영한 ‘브레인’의 수술 장면은 그동안의 의학 드라마에서는 보지 못했던 생생함을 안겨준다.

 

 

 

 환자에게 따뜻한 의사 김상철...

 

 극중 이강훈은 동기이자 라이벌인 준석(조동혁)과 사사건건 대립하지만, 준석이 자신보다 실력이 아래라고 여겨서 늘 깔본다.

 그런 강훈도 김상철(정진영) 교수 앞에서는 고개를 숙일 수밖에 없다.

 

 의술에서 타의 추종을 불허할 정도로 실력을 갖춘 김 교수는 환자들을 따뜻하게 돌보는 인품의 소유자이기도 하다.

 평소 새까만 후배 의사들에게도 깎듯이 존대를 하는 그는 그러나 후배들이 환자 치료를 소홀히 하는 모습을 보이면 눈물이 찔끔 날 정도로 호통을 치는 카리스마도 갖췄다.

 김 교수 역을 맡고 있는 정진영은 연기에는 철저한 자세로 임하는 한편 일상적으로는 늘 온화한 태도를 지닌 배우다.

 그러한 모습이 극중 김 교수에게 잘 투영되고 있는 듯싶다.

 

 배우 정진영은 학벌이 좋은 덕분에 지적인 면이 부각되지만, 악기를 잘 다루고 노래를 즐겨 부르며 술을 좋아하는 로맨티스트의 면모도 강하다.  그는 언론 인터뷰에서 “술 한 잔 하면서 사람들의 이야기를 많이 들어준다”고 했다.

 정진영과 술자리를 한 사람들은 실제로 그가 아주 좋은 술벗이라고 말한다.

 신문기자 출신으로 영화프로듀서를 하고 있는 임범 씨가 최근에 펴낸 책 ‘내가 만난 술꾼’에 따르면, 정진영은 크게 취해서도 몸이 흐트러지지 않고 다른 사람들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는 진정한 술꾼이다.  
 

 ‘브레인’의 김 교수는 늘 환자와 그 보호자들의 처지를 이해하고 격려해주려 애쓴다.

 그는 뇌종양에 걸린 딸 때문에 절망에 빠진 엄마에게 이렇게 말한다.
 “종양이란 녀석이 어려운 자리에 있지만, 엄마가 이렇게 간절한 마음이라면 우리 한 번 싸워볼까요.” 
 이강훈은 김 교수가 환자들에게 이렇게 친절하게 대하는 것을 가식이라고 여긴다.

 김 교수도 자신처럼 공명심에 사로잡혀 있으면서도 인격자인양 굴기 위해 그것을 숨기고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강훈의 후배인 윤지혜(최정원)는 김 교수의 휴머니즘을 본받고 싶어 한다.

 

 지혜는 이른바 ‘나쁜 남자’의 매력을 풍기는 강훈을 이성으로 좋아하면서도 그의 의사로서의 태도에는 문제가 있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환자의 보호자를 위로하기 위해 ‘미안하다’는 말을 하게 된 것을 수치스럽게 여기는 강훈에게 이렇게 말한다.

 “전 저희 아빠가 병원에 여러 번 입원해봐서 알거든요. 그런 때 의사가 미안하다, 한 번 잘해보자, 이렇게 말해주면 얼마나 힘이 되는데요.” 


 지혜의 말처럼 환자와 그 보호자들은 의사의 친절에 큰 위로를 받는다.

 그것을 의사들이 모를 까닭이 없는데 왜 그렇게 하나같이 무표정한 얼굴을 할까?

 

 ‘브레인’의 이강훈은 "환자에게 쓸 데 없는 희망을 주지 않는 것이 의사의 도리이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어투가 냉정한 게 듣기 싫긴 하지만, 그의 말이 틀린 것은 아니다.  겉으로 친절하게 구는 것보다 의술로 고치기 위해 애쓰는 게 의사의 진정한 자세라는 말도 맞다.  환자나 그 보호자에게 감정적으로 에너지를 소모하는 것보다 수술과 연구에 더 힘을 쏟는 게 효과적일 것이다.


 강훈은 그렇게 냉정하게 말하면서도 의사로서 환자를 치료하는 일에는 온 힘을 다한다. 수술을 한 환자의 곁을 밤새 지키며 쪽잠을 자기도 한다. 지혜는 그 모습을 지켜보며 강훈의 본마음이 선량할 것이라고 믿고 싶어 한다.
 ‘브레인’은 향후 강훈이 김 교수와 갈등을 일으키다가 그의 감화를 받아 따뜻한 의사로 거듭나는 과정을 그린다고 한다.

 얼핏 들어서는 식상한 줄거리인데, 그 과정을 어떻게 그리느냐에 따라 감동의 진폭이 달라질 것으로 보인다. 
 

 

 

 책 '나는 의사다’...

 

 

  최근 국내에 소개된 책 ‘나는 의사다’를 읽으면서 ‘브레인’의 의사들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었다. 예일대 의과대 교수인 셔원 B. 눌랜드가 쓴 이 책은 의사들의 경험을 흥미진진하면서도 가슴 먹먹하게 전하고 있다.

 특히 머리를 다쳐 응급실에 들어온 어린 아이 환자를 수술하면서 신경외과 의사와 간호사들이 모두 울었다는 대목은 목울대를 뜨겁게 했다. 엄마의 남자친구에게 폭행을 당해 뇌를 다친 아이를 살리지 못하게 될 것 같자, 수술실은 비탄에 잠겼다고 한다. 

 

이 책은 번역자 조현욱 씨의 말처럼 도저히 어찌할 수 없는 병이 진행되는 것을 보아야 하는 의사의 무력감과 함께 불가사의한 치유 과정에 대한 놀라움을 담고 있다. 

 

 이 책을 읽으며 그동안 의사들에 대해 품었던 ‘적의(敵意)’가 많이 풀리는 것을 느꼈다.

 몸이 아파 병원에 갔을 때 의사들의 권위적인 태도 때문에 더 아픈 것 같은 경험을 할 때가 많았다. 환자로서 증상을 충분히 설명하고 싶지만, 의사가 서둘러 진료를 끝내고자 하기 때문에 진료실을 언제나 쫒기는 듯이 나와야 했다. 그런 상황에 대해 불만이 많을 수밖에 없었다. 의사들 역시도 그에 대해 고민을 한다는 것을 ‘나는 의사다’를 통해 알 수 있었다.

 

 며칠 전 종합편성채널의 한 방송사가 ‘친절한 의사들’이라는 프로그램을 시작했다고 해서 속으로 웃었다. 의사들의 불친절에 대한 불만이 얼마나 많으면 제목이 친절을 달고 나왔을까.
 이 프로그램은 이른바 국내 최고의 명의들이 스튜디오에 출연해 시청자와 1대 1 전화 상담을 하고, 고급 의료정보를 전달하는 내용을 담는다고 한다.  의술로 몸의 병을 고칠 뿐 만 아니라 친절로 마음의 아픔까지 치유해주는 의사가 ‘명의’라는 인식을 심는 계기가 될 지 주목된다. 

 

 다소 엉뚱한 상상을 해 보자면, 드라마 ‘브레인’의 이강훈은 과연 ‘친절한 의사들’에 출연할 수 있을까.

 김상철 교수를 멘토로 해서 그가 환자에 대한 태도를 바꾼다면 가능할지 모르겠다.
  ‘나는 의사다’라며 목에 잔뜩 힘을 주는 그에게 “그래요, 당신은 의사에요”라고 따뜻한 음성으로 말해주고 싶다.

 참으로 어렵고 힘든 일을 하는 그에게 그 정도 찬사쯤은 해 주면서 친절을 바라야 하는 것이 아닐까.  

 

 책  ‘나는 의사다’ 의 저자는 몸이 아팠을 때 환자로서 의사에게 좀 더 잘 응대할 수 있었다고 했다.  의사의 처지를 이해하니 그의 태도에 주눅 들지 않고 자신의 증상을 침착하게 효과적으로 설명할 수 있었다는 것이다.

 그 말을 들으며 어쩌면 의사들이 환자에게 더 이해를 바라는 것인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해 봤다.     

 

 

장재선 / 문화일보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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