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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취미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 그리고 윤동주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이 없이 살다 간 민족시인 윤동주. 올해 초 한 출판사에는 1955년 발행된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 초판본을 그대로 복원하여 출판하였고, 더욱 와 닿는 그때 그 시절의 윤동주 감성을 재현하면서 베스트셀러(한국출판인회의 집계)에 올랐습니다.





일제강점기, 28세의 나이로 짧은 생을 마감한 윤동주의 생을 다룬 영화 동주는 저예산 영화로 개봉 당일 개봉관 수는 370개 남짓이었지만 영화 예매 순위를 역주행하며 대중들의 큰 사랑과 관심을 받고 있습니다. 출판, 영화뿐만 아니라 연극, 뮤지컬, TV, 라디오 등 윤동주 신드롬은 대단하기만 합니다. 이곳저곳에서 느껴지는 윤동주 열풍 때문인지 학창시절 문학 시간으로 돌아가 교과서에서 읽었던 윤동주 시인의 시들이 다시 보고 싶어졌습니다.



<윤동주 시인의 연희전문학교 졸업 학사모 사진>



자화상(自畵像) -윤동주


산모퉁이를 돌아 논가 외딴 우물을 홀로 찾아가선
가만히 들여다봅니다.
우물 속에는 달이 밝고 구름이 흐르고 하늘이 펼치고 파아란 바람이 불고 가을이 있습니다.
그리고 한 사나이가 있습니다.
어쩐지 그 사나이가 미워져 돌아갑니다.
돌아가다 생각하니 그 사나이가 가엾어집니다.


도로 가 들여다보니 사나이는 그대로 있습니다.
다시 그 사나이가 미워져 돌아갑니다.
돌아가다 생각하니 그 사나이가 그리워집니다.


우물 속에는 달이 밝고 구름이 흐르고 하늘이 펼치고 파아란 바람이 불고 가을이 있고 
추억처럼 사나이가 있습니다.



자아를 비추는 거울 역할을 하는 우물. 그 우물 안에 비친 갇힌 자아는 밉기도 하고 가엾기도 합니다. 그래서 몇 번이고 돌아서 버리지만 사나이는 또다시 돌아옵니다. 수차례 자기혐오와 자기 연민 사이에서 갈등하다가 결국, '그리움' 그리고 '추억'으로 사나이를 감싸 앉습니다. 투철하고 치열한 자아성찰은 윤동주 작품의 주된 모티브가 되어 고통의 현실에 맞서고 있습니다. 자화상은 짧은 생을 마감한 윤동주의 장례식장에서 낭송된 시이기도 합니다. 마지막 고국에서 눈을 감는 그날까지 울려 퍼진 그의 자아성찰은 작은 우물 속을 넘어 넓디넓은 하늘나라에서도 계속 되었을 것입니다.



<일본 유학 첫해인 1942년 여름방학에 귀향한 윤동주(뒷줄 오른쪽)>



쉽게 씌여진 시 - 윤동주


창 밖에 밤비가 속살거려
육첩방(六疊房)은 남의 나라.


시인이란 슬픈 천명(天命)인 줄
알면서도 한 줄 시를 적어 볼까,


땀내와 사랑내 포근히 품긴
보내 주신 학비 봉투를 받아


대학 노-트를 끼고
늙은 교수의 강의 들으러 간다.


생각해 보면 어린 때 동무를
하나, 둘, 죄다 잃어버리고


나는 무얼 바라
나는 다만, 홀로 침전(沈澱)하는 것일까?


인생은 살기 어럽다는데


시가 이렇게 쉽게 씌어지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다.


육첩방(六疊房)은 남의 나라
창 밖에 밤비가 속살거리는데,


등불을 밝혀 어둠을 조금 내몰고,
시대처럼 올 아침을 기다리는
최후의 나,


나는 나에게 작은 손을 내밀어
눈물과 위안으로 잡는 최초의 악수.



쉽게 씌여진 시는 1942년 6월에 쓰인 시로 윤동주 시인의 마지막 작품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어두운 조국의 상황과 대비되어 시를 쉽게 쓰는 것을 부끄러워하고 반성적인 태도를 보입니다. 육첩방은 다다미를 6장 깐 일본식 방입니다. 윤동주를 구속하는 숨 막히는 공간이자 절망적인 공간입니다. 남의 나라 육첩방에 사는 지식인 윤동주의 고뇌가 짙게 드러나지만 결국, 조국 광복의 아침을 기다리며 새로운 세계에 대한 희망을 가지게 됩니다. 우울하고 무기력한 삶을 사는 ‘나’는 삶을 반성하고 극복하는 ‘나’에게 작은 손을 내밀어 최초의 악수를 나눕니다. 현실에 절망하지 않고 새로운 날을 기다리겠다는 의지가 가득합니다.



<윤동주가 1941년에 지은 서시.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에서. 출처 : 한국민족문화대백과>



서시序詩] 윤동주


죽는 날까지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이 없기를
잎새에 이는 바람에도
나는 괴로워했다.


별을 노래하는 마음으로
모든 죽어 가는것을 사랑해야지
그리고 나한테 주어진 길을
걸어가겠다.


오늘 밤에도 별이 바람에 스치운다.



시인들이 가장 사랑하는 시 1위로 뽑힌 서시입니다. 별이 바람을 스치는 일제 강점기 암흑기 시대. 끝없이 흔들리는 현실 속에서 중심을 잡는 일은 쉽지 않았고 고뇌와 번뇌는 시인 윤동주의 숙명이었습니다. 결박한 시대의 하늘은 칠흑이지만, 결백한 청춘은 티끌 없는 순백입니다. 부끄러운 현실이지만 시로써 저항할 수밖에 없는 시인의 운명을 받아들이고, 윤동주는 모든 죽어가는 것을 사랑하고 주어진 길을 가겠노라 결백합니다.



<출처: 영화 ‘동주’ 네이버 스틸 컷>



윤동주는 1917년 12월 30일 만주 북간도 명동촌에서 태어나 15세부터 시를 시작했습니다. 일본 도시샤 대학 영문과에서 학업 도중 귀향하려다 항일운동 혐의로 일본 경찰에 붙잡혀 2년형을 선고받고 후쿠오카 형무소에서 복역하다 1945년 2월 16일 광복을 6개월 남기고 짧은 생을 마감했습니다.


평생을 ‘부끄러움’과 ‘자아성찰’로 보내며 시대적 상황과 맞물려 절망 속에서도 민족의 등불이 되고자 고뇌했던 윤동주. 의무적인 교육과정으로 교과서에서 시험을 위해 달달 외웠던 윤동주의 시를 이제 시대의 아픔과 잃어버린 상실감으로 느낄 수 있는 나이가 되었습니다. 세상에 치이고 바쁜 일상을 핑계 삼아 정작 중요한 것을 잊고 사는 현실이 부끄러워졌습니다. 우리는 무엇을 위해서 살고 있는 것일까요? 버거운 현실에서 허덕이며 홀로 침전하는 나를 어떻게 하면 일으켜 승화시킬 수 있을지...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 그리고 윤동주와 함께 우리의 인생을 다시 헤아려 보는 시간 되시길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