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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취미

'누구에게 한 번이라도 뜨거운 사람이었느냐' 버킷 리스트

  ‘연탄재 함부로 발로 차지 마라 너는 누구에게 한번이라도 뜨거운 사람이었느냐'

  안도현 시인의 유명한 시 ‘너에게 묻는다’ 의 전문입니다.

  이 시에 대한 대체적인 평가는  “짧지만 긴 감동을 준다” 는 것입니다. 그런데 저는 긴 감동은 커녕 짧은
  동감도 해 본 적이 없습니다. 인생의 철리(哲理)를 설교조로 훈화하는 것에 대해 어깃장을 놓는 심사 였
  겠지요.


이 충동이 잦아든 것은 불혹의 나이를 지나서입니다. 어느 날 술자리에서 한 친구가 이 시를 읊조리는데, 제 속 깊숙이에서 맑은 눈물이 흐르는 것을 느꼈습니다. 영화 ‘버킷 리스트(The Bucket List)’(롭 라이너 감독)를 보면서 한동안‘연탄재’시에 대해 그랬던 것처럼 가벼운 항심(抗心)을 느꼈습니다.

 


“삶을 뜨겁게 사랑하라” 는 주제가 너무 드러나 있기 때문이었겠지요. 일부 영화평론가들이 관람 후에 고개를 외로 꼰 것도 같은 이유였을 것입니다. 그러나 영화를 다 보고 나니 긴 울림이 남았습니다. “자네 인생이 다른 사람을 기쁘게 했는가”라는 대사가 귓전에 계속 맴돌더군요.


이 대사는 주인공 카터(모건 프리먼 분)가 이집트의 피라미드를 바라보며 세계여행을 함께 하던 에드워드(잭 니콜슨 분)에게 한 말입니다. 에드워드는 그 질문에 무척 당혹스러워하지요. 재벌기업가로 떵떵거리며 살며 네 번의 결혼을 했으나 그것이 과연 다른 이들을 행복하게 해 준 삶이었을까.


 


질문에서 드러나듯이 두 사람은 인생을 마치기 직전에 있습니다. 암 선고를 받고 나란히 한 병실에 입원한 사이지요. 백만장자인 에드워드가 초호화 특실이 아닌 2인실에 입원한 것은 자승자박입니다. 환자를 많이 받아 돈을 더 벌기 위해 자신이 경영하는 병원 전체를 예외 없이 2인 1실로 하라는 지침을 내렸기 때문이지요.

 

자신이 고집한 원칙 탓에 2인실에 입원한 에드워드는 먼저 입원해 있던 카터에게 신경질을 부립니다. 카터 역시 이런 에드워드가 꼴사나울 수밖에 없겠지요. 자동차 수리공으로 45년을 살아온 카터는 비록 부자는 아니지만 어느 누구에게도 꿀리지 않는 높은 자존심의 소유자입니다.

 평생 아내를 아끼며 2남 1녀의 자녀를 헌신적으로 부양해온 것이 그 자부심의 바탕이지요. 티격태격하던 두 사람이 서로에게 마음을 여는 것은 역시 동변상련의 정 때문입니다. 느닷없이 찾아온 병에 속수무책으로 자신의 몸을 내어 주어야 하는 처지로서 서로의 심정을 누구보다도 잘 알기에 두 사람은 어느덧 서로를 의지합니다.


병원 입원실은 1인 특실보다 2인실이 좋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투병의 아픔과 죽음의 공포를 함께 나눌 수 있는 동지가 있다는 것은 크나큰 위로가 되니까요. 3개월 전 까지만 해도 서로 전혀 모르던 사이였던 두 사람이 당초 계획에 없던 세계 여행을 함께 떠나는 것은 카터가 작성하던 버킷리스트를 에드워드가 봤기 때문입니다.

 



버킷리스트는 사람이 죽기 전에(버킷을 차기 전에) 꼭 하고 싶은 것을 적어보는 것입니다. 카터가 적은 것은 ‘모르는 사람을 도와주기’, ‘ 눈물이 날 때까지 웃기‘,  정신병자 되지 말기’, ‘ 장엄한 것 직접 보기’ 등입니다. 그가 정신적 고양을 높이 친다는 것을 알 수 있지요.

 


에드워드가 적은 것은 ‘스카이 다이빙’, ‘ 가장 아름다운 소녀와 키스하기’, ‘ 문신하기’등입니다. 역시 즉물적인 욕망을 솔직하게 드러내는 성품이란 것을 잘 알 수 있지요. 두 사람이 소망을 이루기 위해 함께 여행을 떠나려 할 때, 카터의 아내 버지니아는 눈물바람을 하며 반대합니다. 사랑하는 이를 낯선 이와 함께 떠나보낼 수 없었던 것이지요.

그 때 카터는 “45년간 기름때를 묻히고 살았으니 날 위한 시간을 갖고 싶다” 고 말합니다. 투병생활을 하는 환자를 둔 가족은 이 대목을 눈여겨볼 필요가 있을 듯 합니다. 환자에게 정말 필요한 것은 틀에 박힌 위로가 아니라 그가 정말로 원하는 것을 하게 해주는 것이니까요.


그것을 뒷받침해주고 지지해주는 것이 진정한 사랑이 아닐까 싶습니다. 카터와 에드워드의 세계일주는 스카이다이빙을 통해 관절을 푸는 것으로 시작해서 세렝게티에서 사냥을 즐기고, 피라미드에서 석양을 감상한 후 타지마할, 만리장성을 거쳐 히말라야 산에 도달합니다.


 


이들의 초호화판 여행은 현실에서는 도저히 이뤄질 수 없는, 그야말로 영화 같은 장면들의 연속이기 때문에 평론가들로부터 리얼리티가 떨어진다는 평가를 받았습니다. 그러나 관객으로서는 눈요기를 실컷 하는즐거움을 누릴 수 있지요.

 

이 작품을 연기한 잭 니콜슨과 모건 프리먼이 제 값을 못했다는 평가도 있었습니다. 1937년생 동갑으로 고희를 넘긴 두 명배우가 여행 도중에 경박한 오버 액션을 한 것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이 영화가 종반으로 치달으면서 가족과 이웃의 사랑을 강조할 때, 관객들의 가슴에 자연스런 감동을 가져오는 것은 역시 두 배우의 관록에 힘입습니다.


얼굴 표정 하나만으로 삶의 희로애락을 다 표현하는, 당대의 두 배우를 한 영화에서 만난다는 것은 기쁜 일입니다. 카터는 죽기 직전에 에드워드에게 이런 편지를 남깁니다. “자네 인생의 기쁨을 찾아가게.”  과연 내 인생의 진정한 기쁨은 무엇이었고, 지금은 또 어떤 것일까. 이 영화를 보고 나면 찬찬히 자신의 삶을 들여다보게 됩니다.



 

  오스카 상을 세 번이나 수상했던 잭 니콜슨과 역시 한 번 수상의 영예를 안았던 모건 프리먼의 필모그래피는 화려하기
  그지없습니다. 잭 니콜슨의 수많은 작품 중에서 권하고 싶은 것은 ‘포스트 맨은 벨을 두 번 울린다’(1981년작)와 ‘애정의
  조건’(1983년작)입니다.


  전자는 인간의 음험한 욕망을 폭발적으로 표현하는 그의 힘을 느낄 수 있고, 후자는 복잡한 인생을 관조하며 즐기는 캐
  릭터의 매력을 만날 수 있습니다. 모건 프리먼의 작품 중에선 역시‘쇼생크 탈출’(1994년작)을 꼽고 싶습니다. 어려운 처
  지에 있는 사람의 호소를 가만히 들어주며 이야기의 실타래를 풀어주는 캐릭터는 이후 국내에 소개 된 그의 작품들을
  관통하는 것이니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