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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취미

영화'제8요일'이 말하는 스스로에게 축복되는 소통

사회부에서 기자 노릇을 할 때, 지적장애 성인들의 자활 시설 ‘바다의 별’에 간 적이 있습니다. 수원시 이목동의 야산 자락에 자리한 이 시설은 지적장애인들의 부모들이 돈을 모아 만든 것입니다. 그곳에서 함께 생활하는 20여명의 남녀 지적장애인들은 저의 취재 방문을 무척 즐거워했습니다. 저는 그들의 환대가 고마웠으나 언행이 부자유스러운 사람들과 어울리는 것이 아무래도 불편해서 자꾸 화장실을 들락거렸습니다. 그곳에서 장애인 생활교사로 일하고 있던 한 젊은이는 저의 그런 속내를 읽었는지 이렇게 말했습니다.

 

  “여기 친구들은 다운증후군, 자폐증등을 앓고 있어서 의사소통이 처음엔 어려워요. 하지만, 자꾸 이야기를
   나누다보면 저절로 통하게 됩니다.”




프랑스 영화 제8요일’(자꼬 반 도흐마엘 감독, 1996년작)을 DVD로 다시 보면서 그 젊은이의 말을 절로 떠올렸습니다. ‘제8요일’은 장애인과 비장애인의 소통 과정에서 생기는 희로애락을 생생하게 담고 있는 작품입니다. 세일즈 기법 강사인 아리(다니엘 오떼이유 분)와 다운증후군 환자 조지(파스칼 뒤켄 분)가 주인공입니다. 아리는 아내 줄리(미우 미우 분)와 별거 중입니다.

그는 아내와 재결합을 해서 사랑스런 두 딸과 함께 살고 싶지만, 줄리는 그의 차갑고 타산적인 모습에 너무 질렸던지라 좀처럼 마음을 돌리지 않습니다. 아내의 차가운 반응에 부닥쳐 마음이 어지러운 아리는 비 오는 밤길에 차를 몰고 가다가 지나가는 개를 치게 됩니다. 그 개의 주인이 바로 요양원에서 탈출한 환자 조지입니다.


아리는 조지에 대한 연민 때문에 그를 집으로 데려오는데, 조지는 초콜렛 알레르기로 발작을 일으키거나 만나는 여성마다 구애를 하는 등 이상한 행동을 해서 아리를 기겁하게 만듭니다.
아리는 조지가 혐오스러웠으나, 시간이 지나면서 그의 순수함에 매력을 느낍니다. 아리가 딸의 생일 선물을 전해주기 위해 아내의 친정에 찾아갔다가 문전박대를 당했을 때, 그의 외롭고 슬픈 마음을 달래준 유일한 사람이 조지였습니다.


아리는 조지를 요양원으로 돌려보낸 후 무기력한 나날을 보냅니다. 그러던 어느 날 조지가 요양원 친구들을 모두 데리고 아리의 세일즈 강연장에 나타나고, 아리는 뜻밖의 상황인데도 마치 기다렸다는 듯이 조지 일행과 함께 밖으로 뛰쳐나갑니다. 아리와 조지 일행은 줄리의 집 앞에서 폭죽을 터트리며 불꽃놀이로 딸의 생일을 축하합니다.

줄리와 딸들은 비로소 아리에게 얼어붙어 있던 마음을 녹이고 그에게 다가와 안기지요.

이 작품에서 조지 역을 했던 파스칼 뒤켄은 실제로 다운증후군 환자입니다. 연극무대에서 활동한 적이 있고, 자꼬 반 도흐마엘 감독과는 영화 ‘토토의 천국’에서 호흡을 맞춘 바 있다고 합니다. 그는 ‘제8요일’에 함께 출연한 다니엘 오떼이유와 함께 칸 영화제 남우주연상을 수상합니다.

아시다시피, 염색체 숫자 이상으로 나타나는 다운증후군은 운동장애 뿐 만 아니라 지적장애 현상을 초래합니다. 다운증후군 환자들은 비만 경향을 보이며, 눈꺼풀이 쳐지고 귀가 변형된 모습의 불균형적인 얼굴 특징을 나타냅니다. 영화 속 조지의 모습도 마찬가지입니다. 결코 아름답다고 할 수 없는 조지의 모습을 보면서 관객의 마음은 불편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영화 속 이야기가 진행되면서 조지의 천진하고 순박한 모습 때문에 자주 미소를 짓게 됩니다. 영화의 끝부분에 등장하는 내레이터는 관객의 그런 마음을 헤아리기라도 하듯 의기양양한(?) 목소리로 이렇게 말합니다. ‘ 신은 여덟째날 빠진 것이 없나 확인한 후 조지를 만들었다. 참으로 보기 좋더라.’ 저는 내레이터의 말에 고개를 크게 주억거렸습니다.


저를 그렇게 만든 것은 물론 이야기의 힘이겠지만, 음악도 상당부분 역할을 했다고 생각합니다. 영화 곳곳에 흐르는 샹송 세상에서 가장 다정한 엄마-Maman La Plus Belle Du Monde’는 조지가 꿈에 그리는 엄마의 자상한 목소리 처럼 관객의 마음을 감미롭게 어루만집니다.

 

 
이 영화를 좋은 작품이라고 추천하는 것은 칸 영화제에서 상을 받았기 때문이 아닙니다. 장애인과 더불어 살아가는 일이 얼마나 어려운 일이고, 그래서 또 얼마나 기쁘고 보람 있는 일인지를 잘 담고 있어서입니다. 아리가 조지를 데리고 조지의 누나 집에 갔을때, 누나 부부는 반갑기보다 당혹스러운 표정을 노골적으로 드러냅니다.

 

  자형은 조지에게 요양원으로 돌아가라고 소리치고, 누나는 슬픈 표정으로 이렇게 울부짖습니다.

  “ 조지야, 나도 너에게 할 만큼 했다. 나도 내 인생이 있다.”


중증 장애인을 가족으로 둔 관객이라면 이 대목에서 조지의 누나와 함께 눈물을 흘리지 않았을까요? 저는 그 장면에서 장애인 자활시설 원장으로 일하고 있는 한 신부님의 말을 떠올렸습니다. “ 장애인 문제는 개인, 가족이 책임져서는 안 됩니다. 사회와 국가가 전적으로 맡아서 보호해야 합니다.”
 

영화 속의 아리는 환한 표정을 통해 우리에게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비장애인이든, 장애인이든, 사람과 사람이 적극적으로 소통하며 더불어 살아가는 일은, 스스로에게 너그러움과 아름다움을 부여하는 일이기 때문에 신의 은총을 입는 일과 같습니다.”
 

 

   우리말을 연구하는 한 선배에 의하면, '자(者)’는 ‘그 자가 여기에 왜 왔나’에서처럼 사람을 얕잡아 가리키는 말이기도
   하지만, 일부 명사 뒤에 붙어 그러한 사람임을 뜻하기도 합니다.  학자, 연기자, 작곡자, 작자 등의 용례에서 ‘자’는 사
   람을 얕잡아 가리키는 말이 아니라 ‘그러한 사람’을 뜻합니다.

   그럼에도 ‘장애인’을 ‘장애자’라고 부르면 왠지 비하하는 느낌이 납니다. 언중의 습관이 그렇게 굳어진 듯합니다. 그래
   서 언론에서는 ‘장애자’란 용어를 피하고 있습니다. 저도 장애자란 말은 쓰지 않습니다. 일부 언론인들은 장애인을 ‘장
   애우’라고 표현합니다. 좀 더 존중하는 뜻을 담고 싶어서이겠지요.

 

   그런데 이 용어의 사용은 문제가 있다고 합니다.  보통 사회집단이나 계층을 나타내는 단어는 1인칭, 2인칭, 3 인칭 모
   두의 표현이 가능해야 하나 ‘장애우’의 경우는 1인칭으로 쓸 수 없기 때문입니다.

   '나는 장애우다’는 표현이 가능하지 않기 때문이지요. 다른 집단이나 계층과 달리 ‘장애인’만 유독 집단명사로 ‘장애우’
   라고 부르는 것이 시혜와 동정의 관점이 아닌지 헤아려봐야 한다는 의견도 있습니다. 보다 중요한 것은 공동체의 일원
   으로 편견없이 받아들이고 더불어 살아가겠다는 동료애를 지니는 것이겠지요.


장재선/ 문화일보 기자·소설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