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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통/살아가는 이야기

지리산 자락 효기리의 여름, 고향 어른신을 뵙고

   어제 처남이 집사람과 함께 전주에 사시는 장인어르신과 장모님을 뵈러 처가에 간다고 하여 자진동행하
  였다. 처가에 가는 길에 뜨거운 무더위를 벗삼아 외로움과 싸우고 계실 집사람의 큰 할머님(장인어르신
  의 큰 어머니이심)을 뵈러 가자고 하여 처가댁을 경유, 완주군 구이면 상학 한우마을에서 점심식사를 한
  후, 할머님이 사시는 남원시 이백면 효기리를 향하여 힘찬 출발을 하였다.

 

 

기상청 발표에 의하면 장마철이 끝났다고 하는 데도  심술을 부리듯 가는 길에 소낙비가 열대지방 스콜처럼 오락가락 한다. 이를 보고 처남댁이 "우리 아들 재신이의 마음과 같다" 고 하여 한바탕 웃었다. 궂은 날씨임에도 불구하고 안전 운전을 하는 처남의 수고로 우리 일행은 무사히 효기마을에 도착할 수 있었다.

 


 골목                                                 단정한 수로                                     은행나무 이끼

 

효기마을은 지리산 자락에 고즈녁히 자리잡은  집사람의 고향마을로서 삭녕 최씨 집안의 집성촌이다. 세종 때 한글창제와 문물제도 정비에 기여한 문신 최 항(1409-1474)의 후손들이 사는 동네인 반면에, 1961년 7월 11일 밤, 집중호우로 마을 저수지 둑이 터지는 바람에 110여명(효기마을만 81명)의 사망자를 낸 슬픈 역사를 간직한 마을이기도 하다. 집안 어르신들의 각고의 노력과 당국의 지원으로 마을을 재건하고 후손들이 열심히 정진하여 지금은 사회 각 방면에서 국가발전을 위하여 이바지하고 있는 인물이 많은 곳이다.


마을에 당도하기 전 입구에 있던, 6개월여 동안 나의 집에 거주하시면서 큰 사위인 나와  손주인 나의 두 아들에게도 넘치는 사랑을 주시고 우리 곁을 떠나신 집사람의 조부모님 산소와 장인어르신의 큰 집 어르신 산소에 들러 묘를 하였다.

 

평소 집사람과 처남, 처제는 장인어르신의 큰 어머니, 즉, 집사람의 큰 할머님을 가리켜 "정말 단아하고 당신에게는 엄격하서도 타인에게는 아낌없는 정과 사랑을 베푸셔서 최씨 집안의 대모격의 훌륭한 어르신"이라고 말하곤 하였다. 바쁜 일상으로 인하여 할머님을 자주 찾아 뵙지는 못하고 있는 상황이였다.

 

그런데 드디어, 어제를 D-day 삼아 시간이 갈수록 뵈올 기회가 적어질 큰 할머님을 뵙기 위한 일정을 새벽 5시부터 집을 나서 결행(?)한 것이다. 그동안 할머님께서는 "자식들의 성화에도 자식들에게 폐를 안끼치고 독실한 크리스챤이라 정든 교회를 다니실 목적으로 그냥 시골 집에 사시겠다고 고집하시며 살아오셨다"고 한다.


마을 모정에 다다르자, 처남이 "저 분이 할머님 같다"며 먼저 알아 본다. 내가 얼핏 보기에도 덧없이 흘러가는 세월의 무게를 이기지 못하고 어느 새 할머님께서는 예전의 모습은 아니신 것 같았다. 거동이 불편하셔서 단정했던 머리손질은 흐트러져 있었고 다리가 많이 불편해 보이셨다.


할머님 댁에서 집사람은 그동안 나누지 못했던 이야기를 짧은 시간 속에서도 시간가는 줄 모르고 나눴다. 헤어질 때 할머님께서는 정감어린 손을 흔드시면서 "추석에 또 찾아 뵙겠다"는 손주 며느리와 어린 증손자의 말씀에 무척 기뻐하시면서 주체할 수 없는 눈물과 아쉬움을 삼키셨다.

 

돌아오는 차안에서 식구들과 이런 이야기를 나누었다.  "내가 잠깐 군에 간 두 아들들을 그리워하는 데 큰 할머님 같은 분과 장인어르신, 장모님은 결혼시키기 전에 "금이야, 옥이야" 하며 곱게 키우셨던 딸과 아들들을 얼마나 그리워 하시겠냐?", "우리가 자주 어르신들을 찾아뵙고 안부를 여쭈어 그 분들의 외로움을 덜어 드려야 한다" 하고 내가 말하자,  집사람은 흐믓해 하고, 처남과 처남댁, 어린 조카들까지도 공감을 표시하였다.

 


그리고 애피소드 하나를 소개하자면, 할머님 댁에서 선풍기도 안튼 상태에서 정담을 나눈 후, 마을정경을 카메라에 담느라 마을의 이곳 저곳을 돌아 다니다가 큰 볼일 보러 마을어귀에 있는 슈퍼 화장실에 갔었다.  전통의 "치간" 같은 구식 화장실은 아니었음에도 에어컨은 커녕 소형 선풍기 하나 안달려 있어 그야말로 진땀을 빼고 화장실을 나오니 정신이 없었다.

 

그 순간, 우리 조상님들은 "얼마나 무더운 여름 한 철에도 고생하셨을 까" 하는 생각과 함께 군에 간 두 아들들도 소매 긴 군복을 입고 고생이 많을 것이야!  라는 데까지 생각이 미쳤다.  그렇지만 나의 아들을 비롯한 대한민국의 군에 간 젊은이들은  "젊음이라는 특권을 충분히 활용하여 나의 세대보다도 더 훌륭히 군생활을 잘해내리라" 고 생각했다.

 


오늘 아침, 집사람은 출근하면서 "단 하루가 몇 일로 느껴진 시간이었다"고 하면서 만족감을 우회적 표현으로 표시하여 왔다. 이를 들은 나는 "여보,  그게 다 어르신께 잘하는 당신의 평소 모습때문이야! 라고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비록 어제의 여정이 짧은 기간이었지만 함께 간 가족을 포함한 나에게도 어르신들께 지금보다 더 잘하겠다는 자기세뇌와 다짐으로 이어지기를 바래본다.

 

심철재/ 고양시 일산

참고: http://blog.naver.com/nhichop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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