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의 모든 꽃은 견디고 핀다>
꽃이 아름다운 건
견디고 피기 때문이지
담장 옆 고개 내민 매화
엄동설한 추위 견디고
길가에 수줍은 민들레
무심한 인간 발길 견디지
무덤가 고개숙인 할미꽃
세월에 아픈 허리 견디고
뜨락에 엎드린 씀바귀
속세의 무관심 견디지
우리 삶이 아름다운 것도
견디고 피기 때문이지
찬바람 불면 되뇌어봐
견디면 꽃이 피겠구나
필자의 시집 <하루>에 실린 ‘견디고 피는 꽃’이다. 단지 시구만은 아닐 것이다. 만물은 견디고 핀다. 삶에 주어진 몇 해, 몇 날을 보내면서 우리 또한 견디고 견디며 여기까지 왔다. 불교의 뜻처럼 삶 자체가 고해(苦海)라서가 아니다. 견디고 피는 건 어쩌면 만물의 숙명인지도 모른다.
견디고 피어난
따스한 영혼
몇 해 전이다. 가을의 중턱을 넘어선 10월의 어느 날, 한 음악회에서 ‘소울 플레이어(soul player) 이남현 씨를 만났다. 그는 어깨 아래로 신경이 없는 전신 마비 장애인이다. 그의 운명은 타고난 게 아니라, 중간에 비틀렸다.
대학 시절 목뼈가 부러지는 사고가 운명을 비틀었다. 그는 가혹하게 돌변한 운명에 무릎 꿇지 않았다. 목소리는 고사하고 재채기조차 힘들었던 그가 휠체어에 앉아 노래를 부른다.
‘나는 수풀 우거진 청산에 살으리라. 나의 마음 푸르러 청산에 살으리라….’
평범한 운명의 영혼을 위로하는 ‘비운의 운명’. 비틀린 운명에의 순응이 아닌, 가혹한 운명을 자신의 것으로 당차게 바꾼 당당함. 그 당당함이 쳐져가는 내 어깨에 힘을 얹혀준다. 그러면서 스치는 생각. 그는 그 무수한 날들을 어떻게 견디고 또 견뎠을까. 순간, 눈시울이 찡하니 불거진다.
절망이라는 이름의
쐐기를 박지 마라
절망은 운명이라는 이름으로 당신을 끌고 다니는 족쇄다. 정호승 시인의 산문집 <내 인생에 힘이 되어준 한마디>에는 도구를 파는 악마 얘기가 나온다.
한 악마가 사람들을 유혹하는 데 사용했던 도구를 팔려고 시장에 내놨다. 도구 종류는 많았고, 악마의 물건답게 대부분 흉악하고 괴상망측했다. 한데 진열된 도구들 한쪽에 값을 매기지 않은 작은 쐐기 하나가 놓여 있었다. 물건을 사러온 다른 악마가 궁금해 물었다.
“저건 뭔데 값을 매기지 않았나요?”
물건 파는 악마가 답했다.
“저건 절망이라는 도구인데, 파는 물건이 아니지. 나는 저걸로 틈을 벌려 강하다고 하는 어떤 사람도 쓰러뜨리지. 그래서 다른 건 다 팔아도 저것만은 팔 생각이 없어. 내가 가장 즐겨 사용하는 도구거든.”
시인은 절망에 빠질 때마다 이 이야기를 떠올린다고 했다. 그리고 늘 그 악마가 시인 마음의 틈새에 절망이라는 이름의 쐐기를 박지 않기를 바란다고 했다.
나에게도 큰 울림을 준 얘기다. 운명이 아무리 버거워도, 삶이란 이름의 무게가 아무리 무거워도, 육신의 고통이 아무리 견디기 힘들어도 ‘절망이라는 이름의 쐐기’를 박지 말자. 이미 박혀 있다면 온힘을 다해 뽑아내자.
“운명의 수레바퀴는 방앗간의 물수레보다 회전이 빠르지. 어제 꼭대기에 있던 자가 오늘은 바닥에 있고, 어제 바닥에 있던 자가 오늘은 꼭대기에 올라있으니.”
세르반테스는 돈키호테의 입을 빌려 ‘운명의 회전’이 얼마나 빠른지를 일러준다.
연은 역풍에
높이 난다
남의 사정을 살짝 들추면 다 다름의 사연이 있다. 물질이 풍족하지 못한 사람, 관계가 원만하지 못한 사람, 육신이 건강하지 못한 사람, 자식으로 속앓이를 하는 사람…. 우리는 누구나 삶의 무게를 어깨에 짊어진다. 그 무게는 나만이 온전히 근량을 측정하는 나만의 무게다.
세상의 말은 늘 한계가 있다. 어떤 위로도, 어떤 격려도 눈금의 어느 높이를 넘지 못한다. 내 삶은 내가 감당해야 할 나만의 무게다. “거친 들판에서 발굽이 굳어진 짐승은 세상 어느 길도 갈 수 있다”고 했다. 연은 역풍에 맞설 때 높이 오른다.
꿈을 잃으면 운명이 삶을 지배한다. 삶의 주인이 아닌 운명의 노예가 된다. 삶은 희망과 절망 사이의 왕복달리기다. 때로는 희망 쪽으로 다가가고, 때로는 절망 쪽으로 밀려난다. 하지만 어떤 경우도 꿈은 꼭 움켜쥐자.
고난이 닥치면 그 안의 숨을 뜻을 살피자. 잠시 흔들려도 다시 바로 서자. 봄꽃이 향기롭고 아름다운 건 한겨울 칼바람을 이겨냈기 때문이다. 삶이 어찌 봄날처럼 따스하고, 봄꽃처럼 향기롭기만 하겠는가. 골목골목에 숱한 얘기가 깔힌 게 삶이란 여정 아닌가.
삶의 어느 구간이 버거우면 견디고 견뎌 새로운 디딤돌 하나를 또 건너가자. 그렇게 하나하나 건너 참 귀한 삶이란 길을 걸어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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