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면서 모든 일을 기억한다는 건 어떤 기분일까. 축복된 재능으로 생각할 수 있겠지만, 행복한 일만은 아니다. 10년 전 오늘 먹었던 음식, 시험기간 책에서 봤던 구절, 길에서 마주친 사람이 입었던 옷…. 이런 사소한 기억들까지는 괜찮다. 하지만 실연의 아픔, 사별의 고통 같은 기억까지 생생하게 평생을 안고 살아야 한다면 재능이 아닌 형벌일 수 있다.
실제로 한번 본 장면도 뇌 속에 사진이나 동영상으로 남긴 것처럼 선명하게 기억하는 사람들이 있다. 이런 증상을 가리켜 ‘과잉기억증후군’이라고 부른다. 과잉기억증후군은 때때로 인간에게 축복일 수 있는 망각할 권리를 잃어버리게 한다.
최근 한 지상파 드라마 ‘그 남자의 기억법’에는 망각하지 못하는 남자 주인공이 등장한다. 1년 365일 모든 시간을 기억하는 앵커 이정훈(김동욱 분)이다. 드라마 속 남자주인공은 어머니가 힘들어하던 기억, 여자친구가 눈앞에서 사고로 사망한 순간까지 생생하게 기억하며 힘들어한다. 이러한 과잉기억증후군은 여러 소설이나 영화, 드라마에서도 변주돼 등장해왔다.
과잉기억증후군의 특징은 그때의 일이 단순히 하나의 장면으로만 저장되는 것이 아니라 당시의 기분이나 감정들도 고스란히 기억이 난다는 것이다. 흔히 인간을 ‘망각의 동물’이라고 부르는데 그만큼 고통스러운 기억도 시간이 지나면서 상처가 옅어진다. 하지만 과잉기억증후군을 가진 사람들은 지나간 시간의 즐거움도 괴로움도 모두 안고 살아가게 된다.
과잉기억증후군에 대해서 듣게 되면, ‘시험공부를 하지 않아도 되는 거 아냐’라는 생각이 들 수도 있다. 하지만 과잉기억증후군은 단순한 암기력과는 크게 관련이 없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자신에게 있었던 일(event)을 기억하는 방식이기 때문이다.
뇌 과학 분야에서 과잉기억증후군을 주목하기 시작한 건 오래되지 않았다. 2006년 처음 관련 학술지에 과잉기억증후군 판정을 받은 여성의 사례가 등장하면서부터다. 질 프라이스라는 여성은 35년 동안 자신의 모든 기억을 유지한 채 살아왔다. 특정 날짜에 있었던 일 뿐 아니라 그날의 날씨와 감정까지도 상세히 기억해냈다. 이후 진행된 검사에서 그녀의 대뇌구조는 20개 넘는 영역에서 일반인보다 더 큰 것으로 나타났다고 한다.
다만 과잉기억증후군이 발생하는 이유에 대해선 명확하지 않다. 과학자들은 과잉기억증후군을 겪는 이들은 오래된 기억을 우전두엽과 좌전두엽 모두에 기억하는 것으로 보고 있다. 일반적으로 오래된 과거의 기억은 우전두엽에만 저장하는데, 다른 메커니즘이 일어난다는 것이다.
물론 여전히 밝혀진 것보다 밝혀야 할 것이 많은 영역이 뇌 과학이기 때문에 과잉기억증후군의 이유를 단정할 순 없다. 왜 더 많은 기억의 저장 용량을 갖는지, 또 일반인들은 왜 망각을 하며 살아가는지는 여전히 현대 과학의 숙제다.
<도움말: 한국과학기술정보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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