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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통/살아가는 이야기

나죽자 할머니와 황천길 할아버지

  간호사 7년차, 환자분들 앞에서는 늘 허리 숙여 모시는 걸 생명처럼 여기지만‘난이도’ 가 참으로 높은
  어르신들의 성함 앞에서는 우리 간호사들도 곤혹스럽기만 하다.



하루는, 과거 결핵을 앓으셨던 할아버님이 한분 찾아오셨다. 그리곤 나지막이 말씀하신다.

 


" 나 저기서 기다릴테니까, 이따가 내 차례가 되면 알려줘요. 내 이름 부르지 말구.”

" 예. 알았습니다." 하고 혹시나 싶어 접수증을 봤더니 존함이 글쎄 '황천길' 님 이셨다.

이미 많이 겪어보신 듯 할아버지께서 미리 챙기신 것이다.

 

 

천길(天吉) 이라는 너무나 좋은 이름을 가지고 계셨지만 그게 성(姓)과 어울리지 않은 탓에 오랜 세월 불편하셨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할아버지는 다행히 흉부 X레이 사진과 가래 검사 결과 결핵이 재발하지 않으셨고 상당히 건강하셨다. 돌아가시는 할아버지께 “ 건강하세요. ” 라며 만수무강 을 기원 드렸고 할아버지도 웃으시면서“ 수고들 해요, 또 봅시다.”  라며 즐거운 마음으로 돌아섰다.

 

 

그 후 보름쯤 지났을까. 황 할아버지보다 더 ‘심각한’ 할머니 한분이 찾아오셨다. 할머니 존함은 ‘나죽자’님이셨다.우리는 이미 눈빛으로 '조심'을 약속했다. 할머니 차례가 돼서 슬쩍 봤더니 어디로 가셨는지 안 보인다. 그렇다고 소리 내어“나죽자니임~!” 하고 외쳐 부를 수도 없는 노릇.

 

저만치 앉아 계신 환자분들 사이사이를 한참 훑어 보던 막내 송간호사가 고개를 숙인 채 오수를 즐기시는 할머니를 포착했다. 송간호사의 손짓을 본 김간호사가 곤히 주무시는 할머니 곁으로 조심스레 다가갔다.

 

“ 저기 할머니…” 하며 흔들어 깨우는 순간 수간호사 선생님이 막 뛰어오며 다급하게 외쳤다.
“ 김 선생, 203호 ‘나죽자’ 환자분 퇴원수속 안됐다며 막 화를 내고 찾으시는데 어떻게 된 거야? ”

수간호사 선생님의 질문에 김간호사가 엉겁결에  “ 네? ” 라고 놀라며 그쪽으로 고개를 돌리는 순간 화들짝 잠에서 깨신 할머니가 몸을 일으켜 세우신다.

 

응. 나여. 내가 나죽자여. 나죽자 맞아 ” 소리가 의외로 무척 컸다.

그 성함 ‘나OO’ 때문에 주변 상황은 수습하기 어렵게 돼버렸다.

 많은 사람들이 소리죽여 푸크크크, 하하하! 히히덕….

“ 앗차차차… 이를 어쩐다…. 에궁…. ”

“ 할머니 이쪽에요. ” 눈치 빠른 송간호사가 얼른 할머니를 모시고 진료실로 들어갔지만 이미 뜨악한 지경에 맞닥뜨린 우린 모두 웃지도 웃을 않을 수도 없이 서로의 얼굴만 바라봤다.

 

잠시 후 진료실에서 나오신 할머니 “ 이제 늙었응께 빨리 죽어야 하는디 무신 명줄이 이렇게 길어? ”  하신다.

“ 무슨 말씀이세요? 건강하게 오래 사셔야죠. ” 우리 모두는 지은 죄(?)가 있어서 약속이나 한 듯 합창처럼 말했다.

죄송한 마음에 막내 송간호사가 직접 모시고 가서 처방전 찾아 드리고, 약국 따라가서 약 받아 드리고 택시까지 잡아드렸다.


두 분 이름 석 자, 그 반대로 황장수(長壽)님, 나장수(長壽) 님의 마음으로 항상 건강하시고 오래오래 사시길 기원 드린다.

 

신영하(경기도 부천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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