익숙하다는 것은 낯익다는 얘기다. 자주 만나는 사람, 수시로 마주하는 자연, 간간이 스치는 생각은 모두 익숙하다. 익숙은 편안함이다. 서로를 잘 아니 격식이라는 불편함이 없어서 좋고, 이심전심으로 통하니 눈빛만 봐도 마음이 읽힌다. 그러니 사람들은 익숙한 것에 더 익숙해져 간다. 나이가 들수록 익숙함이 주는 편안함이 자꾸 새로운 것을 거부한다. 중년은 새로움 앞에선 수시로 주춤댄다. 하지만 익숙함은 선도가 떨어진다. 편안함의 유혹에만 빠지면 세상의 신선함을 놓치기 쉽다.

 

 

 

 

 

익숙할수록 신선도는 떨어진다. 데이트를 시작한 청춘남녀는 세상의 모든 것이 새롭다. 전화 한 통화에 가슴이 뛰고, 자장면 한 그릇에 식욕이 녹아난다. 그러다 꽃이라도 받는 날엔 감동 그 자체다. 사랑도 '익숙의 법칙'에서 벗어나진 못한다. 세월이 흐르면 짜릿함도, 설렘도 그 농도가 옅어진다. 그래서 어느 청춘은 결혼이라는 사랑의 골인 지점쯤에서 사랑의 방향을 다시 튼다. 사랑의 신선도가 예전 같지 않다는 생각이 두 사람을 슬며시 벌려놓는다.

 

익숙하면 당연해지고, 당연하면 감사가 흐려진다. 감사가 고개를 숙이면 기대가 고개를 든다. 익숙해질수록 감동은 약해진다. 감동 있는 삶이 아름답다. 김연아가 아름답고, 장애를 극복한 그 누군가의 삶이 아름다운 건 그들이 선사하는 감동 때문이다. 감동이 마른 세상은 오아시스 없는 사막이다. 나이들수록 '감동관리'가 필요하다. 영화도 보고, 책도 읽고, 시도 몇구절 외워야 한다. 메마른 정서를 나이탓으로만 돌리는 건 좀 무책임한 삶의 관리다.

 

 

 

 

 

공자는 '삶의 신선도'를 유지하는 노하우를 귀띔해준다. 다름아닌 '익숙한 것을 낯설게 만들기'다. 쉽게 풀어보면 만물의 재발견이다. 익숙해진 누군가에서 새로움을 발견하고, 낯익은 자연에서 색다름을 찾아내고, 진부한 사고에서 신선한 아이디어를 발굴하고, 무뎌진 양심에서 청량한 마음을 꺼내 보라는 것이다. 사물은 뒤집어 보고, 거꾸로 보고, 돌려봐야 한켠에 숨어 있는 낯섦이 발견된다. 사물은 보는 각도에 따라 모양이, 쓰임에 따라 용도가 달라진다. 뒤집고, 거꾸로 세우고, 돌리는 것은 창의력의 본질이기도 하다. 사람은 재발견도 이치는 다르지 않다.

 

검색의 시대다. 스마트폰으로, 인터넷으로 검색어만 치면 줄줄이 정보가 쏟아지니 엄청난 고효율의 시대다. 하지만 검색이라는 익숙함의 함정으로 사색이나 상상력, 창의력이 매몰되는 건 아닐까. 검색으로 사람의 마음을 들여다볼 수 없고, 자연에 담긴 만물의 이치 역시 꿰뚫어 볼 수 없으니 어차피 거꾸로 보고 돌려보는 사고의 습관이 필요하다. 그러다 보면 그냥 스쳐갔던 이웃이 어느 날 눈에 들어오고, 물가의 개나리에 인생이 담길지도 모른다. 그러면 삶의 신선도가 높아지고 행복지수도 덩달아 올라간다. 세상에 스승 아닌 것은 없다. 이웃도 스승이요, 낙엽도 스승이다. 스승이 가르침을 주듯 자연이 깨달음을 주고, 이웃이 행복의 문을 열어준다.

 

 

 

 

 

새로움의 발견은 마음의 눈을 닦는 것이 출발이다. 마음의 눈이 흐리면 틈새에 숨어 있는 '낯섦'들을 찾아내기 어렵다. 누구는 여행으로 마음의 눈을 닦고, 누구는사색으로 마음이 찌꺼기들을 걸러낸다. 여행은 치유와 깨달음의 여정이다. 속세에 찌들려 영혼이 흐려지면 길을 떠나는 이유다. 사색은 지혜의 원천이고, 속살을 보는 혜안을 밝게 한다. 슈바이처는 '사색의 포기는 정신의 파산선고'라고 했다. 사색은 익숙해진 일상에서 '신선한 낯섦'을 찾아내는 마음의 돋보기다.

 

만물은 무상하다. 오는 것은 언젠가 간다. 이는 누구도 비켜가지 못하는 우주의 진리다. 하지만 무상하다고 주저앉아 세월만 보내는 건 만물의 영장이라는 인간이 스스로의 권리를 포기하는 것이다. 무상한 만물도 이곳저곳 들여다보면 새록새록 맛갈 나는 새로움이 솟아난다. 그래서 삶은 살 만한 것이다. 사물의 속살을 보는 마음의 눈이 맑아지면 세상 사는 맛은 더 고급스러워진다. 그게 행복한 삶이고, 그게 진짜 건강한 삶이다.


글 / 신동열 한국경제신문 연구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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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하 글은 
아프리카 오지로 머나먼 남미의 산골로 젊은 시절을 온통 다바쳐 인류애를 실천하신 정부파견 의사분들의 감동적인 이야기

를 엮어 출판된 
"가난한 지구촌 사람들을 사랑한 한국의 슈바이처들"
내용으로, 발간 주체인 한국국제협력단(KOICA)의 동의를

얻어 건강천사에서 금요특집으로 소개드립니다.
 읽는 모든이와 자라나는 청소년에게 감동과 삶에 귀감이 되길 기원합니다.

 

 

 

 

 

우즈베키스탄의 허준  김광락

단풍나무 그늘처럼

 

 

 

 

 

 

 

 

 

 

 

 

 

 

 

즐거운 마음으로 출근하면, 병원 앞 두 그루의 우람한 단풍나무가 그를 반깁니다.
병원의 수호신처럼 버티고 서있는 나무 그늘이 아름답습니다.
이른 아침부터 그 나무 그늘아래 자신을 기다리고 있는 환자들을 바라보며 다시 한 번 마음을 다잡습니다.

 

 

 

  한의사 김광락

 

 그는 1961년에 태어나, 1987년 동국대학교 한의대를 졸업하였습니다.
 할아버지와 아버지가 한의사였기에, 한의학과의 연결은 자연스러웠습니다.

 

 학교를 졸업하고, 1987년부터 1989년까지 해병대 1사단에서 한의사 군의장교 1호로 근무하면서 영내에 한방진료소를 개설하였습니다. 제대 후 포항에서 한의원을 15년간 운영하면서 틈만 나면 미얀마(Myanmar)와 스리랑카(Sri Lanka) 등지로 단기해외봉사활동에 참가하였습니다.

 

 풍족한 삶을 누리면서, 그는 늘 베푸는 사랑을 떠올렸습니다.
 한의사 김광락은 KOICA(한국국제협력단)의 정부파견한의사로 2005년부터 2007년까지 우즈베키스탄(Uzbekistan)의 한국, 우즈베키스탄 친선한방병원에서 3년간 근무하였습니다.

 

 

 

  정부파견 한의사로 근무하면서 '글로벌 한의학'을 위해 부단히 노력하다

 

 그는, 처음 아무 것도 없는 상태에서 이 병원을 세우게 된 역사를 돌이켜봅니다.

 

1996년 대한한의사협회 산하 KOMSTA(대한한방해외협력병원)는 우즈베키스탄 한국대사관 초청으로 타슈켄트 소재 국립 제1병원에 단기 의료봉사단을 파견한 것을 계기로 1997년 6월에 한국,우즈베키스탄 친선한방 병원을 개원했습니다.


 당시 우즈베키스탄 정부는 타슈켄트국립 제1의과대학교 내 병원 건물
1개동을 10년간 무상 임대하는 조건으로 병원설립이 정식 성사되어, 정부파견한의사들은 고려인과 우즈베키스탄 현지인 등 80여 명의 환자들을 매일 무료로 돌보았습니다.

 한때 환자들이 1년을 넘게 진료날짜만 기다리기도 했으나, 최근 진료시스템이 보완되었습니다.

 

 예약 환자가 6개월씩 밀려 있을 만큼 폭발적인 호응을 얻고 있는데, 이는 한의학이 외국인의 체질에도 상당한 효과를 거두고 있음을 의미하는 것으로 향후 FTA(자유무역협정)에 의한 시장개방과 함께 의료분야에 있어 해외시장 진출 시 그 성공가능성을 높여줄 것입니다.


 그는 한국의 KOICA 및 KOMSTA가 자랑스럽고, 그 봉사활동을 처음 시
작한 선배들의 마음과 노력에 다시 한 번 깊은 존경심을 보냈습니다. 때로는 자신의 능력이 부족하여 KOMSTA와 한국,우즈베키스탄 친선한방병원의 숭고한 사업에 누를 끼치지는 않을까 노심초사하였습니다.

 

 한의사 김광락은 1년 평균 3,200여건의 진료를 실시하였습니다.

 

 또한 150여건의 금연과 금주 및 금마약침 시술을 실시하여 높은 완치율을 보이며 환자들에게 지속적인 호응을 얻었습니다.

 교육 분야에서는 타슈켄트 국립 제1의과대학생과 현지 의료진들을 대상으로 한의학 이론과 실습 강의를 지속적으로 실시하여 높은 평가를 받았습니다.

 

 더욱이 척박한 땅에서 혹한의 시련을 극복하고 민족의 뿌리를 이어 온 고려인이 2십만여 명이나 거주하고 있는 이곳 우즈베키스탄에서 한의학이 단순히 의술을 펼치는 차원을 넘어 보건 분야 발전과 한국,우즈베키스탄 문화 및 경제협력에도 긍정적으로 기여하고 있음은 주지의 사실입니다.

 

 이처럼 한국, 우즈베키스탄 친선한방병원은 동포인 고려인에게는 향수를, 우즈베키스탄에는 국경 없는 무료의술을 펼치고 있는 가운데, 한편으로는 현지 보건과 의료 환경개선을 위해 힘쓰고, 현지 의료진을 대상으로 한의학 강의 및 실습을 통한 교육을 실시하는 등 글로벌 한의학을 위해 부단히 활동하였습니다.

 

 이와 같은 노력에 힘입어 노무현대통령 영부인 권양숙 여사가 활동하였던 민간단체 ‘사랑의 열매’로부터 긴급환자 수송에 절대적으로 필요한 앰뷸런스 한 대를 지원받아 의료봉사 관계자들의 사기 진작에 큰 도움이 되었습니다

 

 

 

  '주는' 봉사에서 '기르는' 봉사로의 전환을 말하다..

 

 한의사들이 수많은 우즈베키스탄 현지인과 고려인 환자를 돌보며 적지 않은 업적을 쌓았지만, 한의학 교육문제는 거의 방치되어 있는 점을 그는 주목하였습니다.

 

 매주 현지 의과대학생들과 관심 있는 병원직원 그리고 우즈베키스탄 의사 등을 대상으로 침구학개론 수준의 한의학을 강의하고
있으나, 진정으로 내실을 기해야 될 시점이라 생각하였습니다. 더욱이 자격증에 준하여 피교육생들이 임상허가증을 받을 수 있도록 도와줬으면 하고 마음먹었습니다.

 

 그리고 타슈켄트에도 무면허 침구사들이 의외로 많이 활동 중인 것을 보고 KOMSTA도 이제는 ‘주는’ 봉사에서 ‘기르는’ 봉사로의 발상의 전환을 모색해야 한다고 역설하였습니다.

 10년간의 계약기간이 만료되고 다시 시작될 10년간의 KOMSTA는 제2의 도약이 필요하였습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교육이 더없이 중요할 것이라 여겼습니다.

 

 식량자급이 어려운 나라에 당장의 식량을 보내주는 것은 매우 중요하고 급한 문제일 것이지만, 궁극에는 식량을 스스로 재배하고 자원화해 나갈 수 있는 시스템을 가르쳐 주고, 더 나아가서는 식량을 받던 나라가 더 어려운 곳을 보살피거나 처음 식량을 제공해준 나라와 상호 발전의 파트너가 된다면 얼마나 좋을까.

 

 식량문제를 한의학으로 바꿔 생각해 볼 때 지금까지 환자치료에 중점을 두었다면 이제부터는 새로운 10년 계획으로 젊은 우즈베키스탄 의사 혹은 고려인들을 교육하여 스스로 우즈베키스탄 국민들을 치료하고 한의학을 이해할 수 있는 능력과 시스템을 세울 수 있도록 도와야 했습니다.

 

 교육을 받은 우즈베키스탄 의사 혹은 고려인 의사들이 언젠가는 선진 한의학을 보유한 한국을 찾을 것이며, 필요에 따라 한국의 한의사들이 우즈베키스탄에 병의원을 개설하거나 교육기관까지 설립이 가능할 것입니다.

 

 그러나 현재 친선한방병원은 KOICA와 KOMATA 그리고 대한한의사협회로부터 연간 3,500여만 원을 지원받고 있으나, 담당 관계자들이 무료진료를 실시함에 있어 발생되는 병원운영비와 열악한 현지 병원환경을 개선시키기에는 턱없이 부족하였습니다.


 특히 1997년에 우즈베키스탄 정부로부터 10년간 무상임대 받은 것이 만
료 돼 이에 대한 대책이 시급히 마련되지 않을 경우 현실적으로 폐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는 실정이었습니다.

 

 그는 병원을 이용하는 환자수가 날이 갈수록 급증할 만큼 호응을 얻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진료장소의 협소함과 낙후된 의료시설로 인해 양질의 치료가 제대로 이루어지지 못하고 있다며, 특히 무상임대 기간 만료로 병원자체가 폐쇄된다면 예약대기중인 많은 환자는 물론 장기적으로 국익에도 도움이 되지 않으므로 정부차원 지원이 시급하다고 말했습니다.

 

 그는 향후 타슈켄트국립 제1의과대학교에는 침구학부가 공식적인 커리큘럼으로 승인될 예정이며, 보건복지부에서는 러시아어 한의학 교재 제작을 위해 지원키로 하는 등 우즈베키스탄에서 한의학을 통해 병원과 교육이 공존하는 기대이상의 성과를 거두고 있다고 덧붙였습니다

 

 

출처  가난한 지구촌 사람들을 사랑한 한국의 슈바이처들 / 한국국제협력단(KOICA)

 

 

 

 한국국제협력단의 도움을 받아 금요특집으로 마련된 '한국의 슈바이처들' 시리즈가

 이번 회차를 마지막으로 끝맺게 되었습니다.

 그동안 금요특집을 사랑해주신 모든 분들께 감사드리며,

항상 건강하고 따뜻한 글로 사랑받는 건강천사 운영진이 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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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난한 지구촌 사람들을 사랑한 한국의 슈바이처들"
내용으로, 발간 주체인 한국국제협력단(KOICA)의 동의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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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팔라우의 슈바이처  윤성일

아름다운 팔라우에도 아픈사람은 많았다.

 

 

 

 

 

 

 

 

 

 

 

 

 

붉게 떠오르는 태양이 마이크로네시아 200여개 섬들을 일렁이게 합니다.
태평양 서쪽 끄트머리에 섬의 무리로 이루어진 나라.
바다 한가운데 흩뿌려진 섬들로 이루어진 인구 2만 명 정도의 작은 나라 팔라우(Palau).

 

스페인의 식민지였던 필리핀과 가까워 1543년 이후 오랫동안 그들의 세력권에 있었고, 한때는 독일의 세력 아래, 제1차 세계대전 이후에는 일본이, 제2차 세계대전 이후에는 미국이 각각 지배하다가 1994년 독립하였습니다.

특히 1914년부터 제 2차 세계대전 말기인 일제강점기시대에는 수많은 한국인이 징용으로 끌려와 공항, 항만 및 도로건설에 강제노동을 당하였으며, 수많은 동포가 목숨을 잃었습니다.

 

 

 

  이 팔라우에 한국의 일반외과 전문의 윤성일이 있었습니다  

 

 그는 1952년에 태어나 1977년 중앙대학교 의과대학에서 일반외과를 공부하였습니다. 그리고 1996년에 쌍용건설에 의해 시공된 팔라우국립병원에 KOICA(한국국제협력단) 정부파견의사로 인술을 펼쳤습니다.

 그 병원은 총 병상 수는 80병상으로 내과, 소아과, 외과, 정형외과 및 정신과 병동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그는 이 팔라우국립병원에서 정부파견의사로1996년부터 2004년까지 9년간 근무하였습니다.

 

 그는 일반외과 전문의로 외과병동에서 근무하였으며, 의사는 원주민의사를 비롯하여 미국, 마셜, 피지, 미얀마, 필리핀, 바누아투인 등으로 구성되었고, 간호사도 원주민, 피지 및 JICA(일본국제협력기구) 소속 2명이 함께 하였고, 약사는 원주민과 호주 그리고 미국인으로 구성되었습니다.

 

 그곳에서 유일한 종합병원인 팔라우국립병원에는 외과전문의가 그를 포함해 2명으로 폭주하는 외과진료 및 수술환자로 인해 평일에는 쉴 틈 없이 집도가 계속되었고, 토요일과 일요일에도 응급환자로 인해 병원근무가 빈번하였습니다. 

 또한 그의 전공은 일반외과이나 전공별 외과전문의가 없어 관련 수술 책자를 연구해가며 모든 외과수술을 수행하였습니다.  

 외과 진료뿐만 아니라 팔라우 정부에서 추진하는 청소년들의 알코올 및 마약관련 문제에 관한 예방 및 치료에도 참여하였습니다.

 

 팔라우 원주민 수련의사 8명에게 1996년부터 2004년까지 기본적인 외과수술 기술을 전수하였습니다. 원주민 수련의사에게 전문외과의 교육을 실시함으로써 외국종합병원으로 환자후송에 소요되는 많은 비용을 절감하였습니다.
 1996년 3/4분기부터 2000년 3/4분기까지 그가 작성한 활동보고서에 의하면, 진료인원은 3,772명이었고 수술환자는 556명이었습니다.

 

 대형선박사고와 교량붕괴사고의 발생이 빈번하여 사망자와 중환자가 속출하였습니다.  신경외과 및 흉부외과 환자 발생 시 진료에 필요한 단층 촬영기, 혈중가스측정기, 인공호흡기 등이 절실하였지만 그는 묵묵히 능숙하게 위급한 병상을 훌륭하게 지켰습니다.

 그의 8년간 근무로 팔라우국립병원 일반외과 및 외과 중환자실의 의료 수준이 현저히 개선되었습니다.

 

 

 

  1997년 3월 26일

 

 그리스 소속 화물상선이 파푸아뉴기니 항구를 출발하여 서태평양을 횡단하여 일본으로 가던 중이었습니다.

 51세의 그리스인 선장이 갑자기 선혈을 토하며 의식을 잃었습니다. 응급처치를 요하는 상황이었습니다.

 부선장은 이 사실을 괌 병원으로 연락하고, 배를 괌으로 돌렸습니다.  그러나 위장출혈증상이 악화되면서 의식소실증상이 현저하였습니다. 위급한 상황이었습니다.   멀리 떨어진 괌으로의 항해를 중지하고, 그가 근무하는 팔라우로 항로를 수정하였습니다.

 

 마침내 환자는 팔라우병원에 도착하였습니다. 위출혈 지혈을 위한 내과적인 치료에 역점을 두고 또한 수혈을 동시에 시행하였습니다. 그러나 내과적인 치료에도 증상은 호전되지 않고 상태가 악화되었습니다.

 환자혈액형이 AB네거티브로 혈액이 부족하여 괌 적십자사에 응급협조를 요청하는 전문을 보내고 응급수술을 시행하였습니다.

 

 의식을 잃고 쓰러진 선장은 과거병력상 위출혈로 위 부분 절제수술을 받은 적이 있었습니다.  이번 위출혈은 과거 위장문합수술 부위의 출혈 때문이었습니다. 지혈수술로 출혈부위를 봉합하고서 혈액이 도착하여 수혈하였습니다. 환자 가슴에서 작동하는 KOICA에서 보내준 모니터장치가 중요한 역할을 하였습니다.

 그러나 수술 후에도 환자는 재출혈 소견을 보이고 또한 괌에서 받은 AB네거티브의 혈액도 다 떨어졌습니다.


 괌으로부터 다시 혈액이 도착하여 수혈하였으나, 추가의 혈액이 필요 하였습니다. 그러나 괌에서는 더 이상의 혈액을 구할 수 없어 일본적십자사에 긴급 혈액 요청을 하였습니다.  마침내 이러한 신속하고도 정확한 치 료과정 중 출혈증상이 호전되었고, 중환자실에서 활동도 가능하게 되었습니다.  선장의 장인은 한국전쟁 그리스 참전용사였습니다.

 

 그는 이 환자를 통하여 세계화시대에서의 국제간 의료협력의 중요성을 절실히 인식하였습니다. 혈액을 항공편으로 보내준 일본적십자사, 괌적십자사와 괌병원 의사, 환자 수술을 도와준 필리핀과 팔라우의사, 바누아투 마취과 의사 그리고 원주민 간호사 특히 중환자실 의료장비를 물심양면으로 지원하여 준 KOICA가 없었다면 화물상선 선장의 생명은 보장할수 없었을 것입니다.

의술에는 국경이 없음을 절실히 깨닫는 미담이었고, 유능한 정부파견의사의 쾌거였습니다.

 

 

 

  의사 윤성일은 헌신적인 의료활동으로 팔라우 정부로 부터 신임을 얻었습니다.

 

의사 윤성일은 성실하고 헌신적인 의료 활동으로 팔라우정부로부터 두터운 신임을 얻었으며, 주민들에게도 명성이 널리 알려져 양국간 우호협력관계 증진 및 한국의 이미지를 높였습니다. 팔라우에서는 그를 ‘Dr.Yoon’이라 불렀습니다.

공무원들은 물론 팔라우 시내에서 그를 만나는 주민들은 반갑게 인사를 나누며 존경과 감사의 마음을 전하였습니다.

 

의사 윤성일은 임기를 마치면서 KOICA에 보고서를 보냅니다.

  의료수준의 전반적인 향상으로 의료파견의사의 보수교육과 파견근무중의 보수교육이 절실하며, 파견의사는 파견국 의사

  및 외국인 의사와의 선의의 경쟁으로 종래 일반적인 한국의 의료수준을 후진국에서 하향적으로 지원한다는 사고 자체를

  전환하여야 한다.

  파견 전에는KOICA의 지정병원에서 파견의 전공 이외의 출산과 분만, 외상 성 골절 치료와 두개골과 흉부외과 외상환자 등

  일반적으로 요구되는 외상치료의 집중교육이 필요하다. 


아름다운 섬에서 살아가는 다정하고 순박한 팔라우 국민들도 삶과 죽음의 갈림길에서 고통을 받습니다.

이른바 대동아전쟁시기에는 수많은 한국인이 이국땅의 고혼이 되어 우리에게는 슬픔의 역사를 묻어야 했던 섬나라 입니다.

 

아름다움과 슬픔이 공존하는 팔라우에서 의사 윤성일의 성실하고도 유능한 의료지원활동은 OECD(경제협력개발기구) 국가인 한국의 위상을 그들에게 오롯이 전하였고, 그가 받은 존경과 사랑은 징용으로 스러져간 한국인의 원혼을 한껏 달랠 수 있었습니다.

 

팔라우 현지 신문기사 자료

 

 

 

출처  가난한 지구촌 사람들을 사랑한 한국의 슈바이처들 / 한국국제협력단(KOIC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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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용으로, 발간 주체인 한국국제협력단(KOICA)의 동의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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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페루의 슈바이처  문장호

  가난한 인디오의 만병통치약

 

 

 

 

 

 불가사의한 잉카문명을 꽃피웠던 나라, 페루(Peru).  아름다운 절경에 잉카인의 슬픔을 담았던 마추픽추.

 인구의 반을 차지하는 잉카제국의 후예 인디오들은 옛 제국의 영화는 뒤로하고 도시 빈민으로 전락하여 까야오 지역과 같은 빈민지역에 살고 있습니다. 

 

 1992년 페루 대통령 후지모리 방한을 기념하기 위해 KOICA(한국국제협력단)에서 총 15개의 병원을 지어주기로 했습니다.  

 까야오의 제1병원을 시작으로 꼬마스 제2병원, 아마존지역의 제3병원 그리고 안데스지역의 제4병원 등이 있습니다.

 

 

첫 번째로 세운 까야오병원은 저렴한 비용으로 최고의 의료 서비스를 제공하고 있어서 이른 새벽부터 환자들은 줄을 서기 시작합니다. 모든 것에서 소외된 삶을 살고 있는 이들에게 의료혜택이 있을 리 만무하였으며, 있다고 해도 이들의 생활 수준에서는 엄두도 낼 수 없는 곳들뿐입니다. 그래서 그들에게 까야오병원은 무엇보다도 꼭 필요한 곳입니다.

 

 

 

이 병원을 지켰던 의사 문장호.

 

그는 1955년에 태어나, 중앙대학교 의과대학에서 공부를 마쳤습니다. 비뇨기과 전문의였던 그는 한국에서 유능한 의사로 남부러울 게 없었습니다.

 

 그는 KOICA의 정부파견의사로 가족과 함께 1993년 페루 리마에 첫발을 디뎠습니다. 안정된 서울생활을 정리할 때는 쉽지 않았습니다. 가족들과 2년을 약속하고 도착한 곳 페루. 그 때 페루는 경제위기에다 좌익게릴라들 때문에 걸핏하면 전기가 끊기는 등 어수선한 전쟁터를 방불케 했습니다.

 

의사인 그도 결코 안전할 수 없었던 곳에서의 생활. 한국으로 돌아가고 싶다고 밤새 울고 투정하는 아이들을 달래며 그가 쉽게 그곳을 떠나지 못하는 이유는 그가 의사로서 목표한 바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는 한국, 페루 의료원에서 비뇨기과와 내과를 담당하여 외래환자 진료업무를 수행하였습니다.

 

 비뇨기과 전문의지만 외과수술이나 소아과 진료를 할 때가 적지 않았습니다. 일단 그를 찾아온 환자를 그냥 돌려보낼 수 없었습니다. 파견 기간 동안 5만 명에 가까운 환자를 진료하였습니다.

 

 또한 그는 결핵환자 전담 진료 병동 건립 및 리마시 외곽 빈민 부락에 대한 순회 진료사업 등 열 개가 넘는 의료단 소규모 프로젝트를 맡아 진행하였습니다. 이 밖에도 한국, 페루 의료협력사업 현장 관리 및 지역 전문가의 역할을 하였으며, 민간 외교사절로서 국위 선양 및 양국간 우호관계 증진에 기여하였습니다.

 

 까야오병원은 교민들에게도 없어서는 안 될 곳이었습니다.

 언어의 장벽 앞에 병을 키우기 일쑤인 이민 1세대들. 그들에게 그는 만병통치약이나 다름없었습니다.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고 그들의 전화상담을 받으며 멀리서 찾아오는 환자들을 반갑게 맞았습니다. 늦은 밤 식탁을 수술대로 내줘야 하는 경우도 있었지만, 언제나 환자를 먼저 생각하는 그는 그들의 주치의임을 자처하였습니다.


1994년 11월. 그가 KOICA 총재에게 보낸 편지의 일부분입니다.


   정주년 총재님께.


  지난 봄 새로 부임하시면서 보내주신 격려 편지에 답신도 못 드린 채, 이번에 새로이 공로패와 함께 보내주신 서신을 읽게

  되니 송구스러운마음을 금할 수가 없습니다.
   페루의 제가 근무하는 병원은 잘 알고 계시겠지만, 후지모리 대통령의 한국방문을 기념하기 위하여, 우리 KOICA에서 건설

  하여 이곳 정부에 기증한 병원으로서, 파견의사로서는 처음으로 우리 손에 의해 건설된 병원에서 근무하고 있습니다.

 

   이제는 병원운영도 완전히 궤도에 올라, 금년 7월 이미 개원 1주년 기념행사를 성대히 치렀으며, 현재 치과의사와 임상병리

  의사를 포함하여 의사 6명 외에 간호사, 의료기사, 행정직원 등 20여 명이 함께 근무하고 있으며, 월 진료인원 2,000~2,500

  명, 연인원 3만 명에 육박하는 진료실적을 보이고 있습니다. 한국,페루의료센터라는 이름에 걸맞게, 현지주민들 뿐만 아니

  라, 이 지역의 한국인 선원들 그리고 교민들까지도 멀리서 찾아와 진료를 받고 있습니다.

 

   그러나 까야오보건청 산하의 일차 진료기관이기 때문에 입원과 수술이 안되는 것이 아쉬운 점입니다.
   제 개인적으로도, 처음에는 일종의 텃세라고도 할 수 있는 현지 의사들의 견제도 받았으며, 우리가 지어준 병원인데도

  불구하고, 운영권이 이미 이곳 보건청 소속이기 때문에, 개인진료실을 내주지를 않아 애로가 많았으나, 대사관의 협조와

 또한 어떠한 이해관계 없이 단지 도움을 주기 위하여 파견되었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 노력한 결과, 출근 4개월이 지나서야

  개인진료실을 확보했습니다.

 

   이제는 아침에 출근하면서 저에게 진료하기 위해 병원문도 열기 전에 아침 일찍 와서 기다리고 있는 안면 있는 환자들의

 인사를 받을 때는 보람과 기쁨을 느낍니다. 게다가 Project의 일환으로 지원해주신 X-Ray 장비나, 임상병리검사장비 덕분에

 일차 진료기관으로서는 이 지역의 다른 보건소들과는 비교할 수 없는 우위를 차지하고 있는 점이 또한 흐뭇합니다.

 

 

 주로 까야오와 꼬마스병원에서 진료를 하던 그는 페루생활에 적응이 되면서 누구보다 자신을 필요로

하는 사람들에게 도움이 되었으면 하는 마음이 간절했습니다.

 

 페루의 사회구조는 양극화가 심하여, 원주민이나 빈민계층과 일부 부유층에 대한 의료시설 및 혜택의 차이가 매우 심하였습니다.  빈민계층을 위한 보건소를 포함한 공공의료기관이나 사회보험병원들은 시설도 빈약하고 환자들이 많아 끝없이 기다려야 했으며, 의료진들 역시 박봉에 따른 의욕감소와 무성의로 일관하였습니다.

 

 반면에 부유층을 상대로 하는 시립병원들은 진료수준이나 시설도 미국이나 유럽 못지않았으며, 따라서 진료비 자체도 상당히 높았습니다.  예를 들어 한번 진료만 받는데 90달러, 정상 분만비용이 2,500달러, 또는 단순한 맹장수술이 3,000달러 등 상식선에서 가늠하기 어려웠습니다.

 

 그래서 시작한 것이 빈민촌의 순회 진료였습니다. 우연히 알게 된 선교사의 도움으로 히까마르까를 포함한 몇 개 빈민지역의 진료가 시작되었습니다. 전혀 의료혜택이 없고 철저하게 소외되어 사는 사람들. 가끔 진료를 가는 것이 그들에게 얼마나 도움이 될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을 가졌던 그는 오히려 작은 일이 더욱더 그들에게 절실하다는 사실을 깨닫습니다.


 그들의 반응은 너무나 좋았습니다. 그들은 감사의 표시로 자신들의 땅을 제공하며 상주진료소를 세워줄 것을 요청했습니다. 1999년 그는 리마시 변두리 비타르테지역 빈민가에 작은 병원을 지었습니다. 사재를 털고 현지 동포들의 도움을 조금씩 모았습니다.

준공테이프를 끊던 날, 그는 부인의 손을 꼭 잡았습니다. 아내의 말없는 격려가 없었다면 그만두었을지도 모를 일이었기 때문이었습니다.

 

 비타르테 빈민촌에 병원을 짓고 나서 그는 더 바빠졌습니다. 까야오 제1의료센터에서 정상근무를 마치고 1주일에 두 번씩 오후에 이 곳 병원으로와 무료진료를 보았습니다. 그러면서 페루 친구들을 여러 명 사귀었습니다. 의사와 간호사를 포함한 현지 자원봉사자들입니다. 그들은 교대로 시간을 내어 비타르테병원을 지켰습니다.

 

 그는 2001년부터 2002년까지 꼬 마스지역 보건소 최초로 정관수술을 시행하여 모자보건사업에 기여하였습니다. 또  그는 항상 빈민촌의 부족한 병원시설을 제대로 갖추기 위해 조만간 다시 일을 벌여야 한다는 생각으로 고민하고 또 고민하였습니다.

 

 

 1993년. 안정된 서울생활을 접고, 가족들과 2년을 약속하고 도착한 곳 페루에서 의사 문장호는 10년간의 정부파견의사 임무를 훌륭히 수행하였지만, 귀국하지 않았습니다.

 

2009년 5월.《서울경제신문》에 이런 기사가 실렸습니다.

   이에 따라 대사관 측은 본국에서 아직 타미플루가 도착하지도 않았으며, 예방백신이 아니라는 해명을 하느라 진땀을 흘려


 야만 했다. ‘동포사
회의 주치의’로 불리는 한,멕병원의 문장호 박사도 ‘인플루엔자(H1N1)의 백신은 아직 없다.’고 확인해 주면

서 ‘타미플루는 치료약이라는 점을
분명히 했다.


그의 소식이 반가웠습니다.

지금도 그는 중미 멕시코에서 동포사회와 가난하고 병든 원주민의 주치의로서 사랑의 인술을 펼치고 있을 것입니다.

 

 

 

출처  가난한 지구촌 사람들을 사랑한 한국의 슈바이처들 / 한국국제협력단(KOIC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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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하 글은  아프리카 오지로 머나먼 남미의 산골로 젊은 시절을 온통 다바쳐 인류애를 실천하신 정부파견 의사분들의 감동적인 이야기

를 엮어 출판된 
"가난한 지구촌 사람들을 사랑한 한국의 슈바이처들"
내용으로, 발간 주체인 한국국제협력단(KOICA)의 동의를

얻어 건강천사에서 금요특집으로 소개드립니다.
 읽는 모든이와 자라나는 청소년에게 감동과 삶에 귀감이 되길 기원합니다.

 

 

페루의 슈바이처  김일경

나이는 숫자에 불과하다

 

 

 

 

 

남아메리카 중부 태평양 연안의 나라. 위대한 잉카제국을 탄생시킨 페루(Peru).

페루는 아메리카 남부에서 유일하게 고대 문화유산을 꽃피웠습니다.

1532년 에스파냐에 정복되었다가 1824년 독립하였습니다. 스페인의 가혹한 폭정에 분노하여 1780년 농민반란을 일으켰던 호세 가브리엘 콘도르칸키의 이야기를 주제로, 영웅이 죽으면 콘도르가 된다던 엘 콘도르 파사(El Condor Pasa)라는 가요는 안데스인의 심금을 울렸습니다.


우리나라에는 <철새는 날아가고>라는 엉뚱한 내용으로 소개되었지만, 페루하면 잉카문명보다 이 노래가 먼저 떠오릅니다.

지금도 서울의 어느 지하철 공간을 총총 걸음하다 보면 인디오 전통복장인 숄과 판초를 입은 페루 사람들을 만납니다.

그들이 연주하는 안데스 전통악기 께나와 싼뽀니아의 경쾌하면서도 비장한 음률에 삭막한 도시인의 심사가 시나브로 촉촉해집니다.

 

1935년에 태어나 서울대학교 치과대학에서 공부를 마치고, 환갑의 나이로 1995년 KOICA(한국국제협력단) 정부파견의사로 페루로 간 한국인이 있습니다. 

 

치과의사 김일경. 

 그는 5년간 꼬모스 제2 의료센터에서 근무하였습니다.

 

1996년 KOICA에 보냈던 편지의 일부분입니다.

  총재님. 안녕하십니까.
  저는 페루 리마 꼬모스 제2병원에 근무하는 정부파견 치과의사 김일경입니다.

 

   세계 많은 나라에 지원하시느라고 노고가 많을 것이라고 사료되옵니다.  간혹 이곳 페루에 대하여 사정을 잘 파악하시겠지만, 저로서는 근무하면서 느낀 점을 총재님께 말씀드리게 됨을 감사하게 생각합니다.

 

  리마에서 북쪽을 향하여 약 1시간정도 벗어나면 시내와는 전혀 달리한 빈민촌이 눈에 들어오고, 국도라고 하지만 소규모 시장들이 즐비하게 들어서서 복잡하기 이루 말할 수 없는 도로입니다.

  이곳 제2병원 꼬모스는 신흥도시로서 사막 한 가운데 위치하여 다소 위험하지만 근무처에 들어서면 우리 대한민국 정부의 고마움을 한눈에 볼 수 있는 병원건물이 있고 모든 장비, 기계 등 KOICA에서 보내주신 시설에 제 자신도 놀랄 정도로 감사하는 마음이 들고 이곳 원주민들은 저만 보면 감사한마음을 몸짓으로 표시하곤 합니다.

 

  이곳 페루 리마에는 일 년에 한 번도 비가 내리지 않아 나무 잎새들은 먼지로 더더기를 입은 것처럼 모양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가끔 이슬비가 내리는데 반가워서 밖으로 나가 비를 맞고자 하면 얼굴에 한 방울씩 떨어지는 빗방울은 콕콕 찌르는 듯한 매서운 감이 있어서 원주민들에게 물으면 잉카문명의 종식의 눈물비라고들 하여 더더욱 마음 쓸쓸하게 합니다. 


 

 

 

 

 

 

 

 

 

 

 

 

 

 

 

 

그는 노익장을 과시하며 페루의 아픔을 치료하였습니다.

 

 연평균 치과진료인원이 약 4,200여 명이었으며 지역주민 구강위생 프로그램을 실시하였고, 현지 의료진에 대한 선진치과의료 기술을 전수하였으며, 한국과 페루 의료협력사업의 현장관리 및 중간역할 그리고 국위선양 및 민간 외교사절로서의 양국간 관계증진에 기여하였습니다.


 사회사업활동에 참여하여 사회봉사와 격지 및 오지주민 보건상태 개선 등을 목적으로 한 NGO단체인 HAPECO(Humanitario Amistad Peru y Corea)의 창립멤버였고, 그 활동의 결실로서 설립된 리마에서 동쪽으로 30km 떨어진 지카마르카 자선병원에서 원주민 의료진과 협조하여 진료단을 구성, 순번제로 주 2회 진료봉사를 수행하였습니다.

 

 마침내 꼬모스 관내 30여 개 보건소 중에서 수년째 진료실적 1위를 고수하여 페루 보건청에서도 많은 관심을 보였습니다.



오지의 주민을 찾아 갈 때는 따로 진료소가 없어서 타고 간 소형트럭 짐 칸에서 환자를 치료하였습니다. 번듯한 진료실은 그에게 사치였습니다.  의사는 아픈 사람을 치료하면 되는 것이었습니다.

 

 꼬모스의 한 주민은 갓 태어난 자신의 딸의 이름을 이 지역에 병원을 지어준 한국인에 대한 고마움의 표시로 ‘덕실’이라는 한국이름으로 출생신고를 하였습니다.

 이것을 기념하여 병원에 초대하여 유모차 등 선물을 전달하였는데, 이를 계기로 이 병원에서 태어나는 아이들의 이름을 한국식으로 지으려고 대사관에 이름에 대해 문의하는 등 한동안 한국 붐을 일으켰습니다.

 

 또한 한국과 페루 사이의 비자 면제 협정으로 한국인 범법자들의 무분별한 유입에 따른 사고와 그동안 페루에 진출했던 거친 한국선원들에게 시달려왔던 주민들의 부정적 이미지를 우호적으로 바꾸었습니다


 그는 결핵 전담 진료실을 조성하였습니다. 전염성이 강한 활동성 결핵을 앓고 있는 환자들이 매일 일반 환자 및 감수성이 높은 소아환자들과 함께 같은 건물에서 진료를 받아 감염위험에 노출되어 있었습니다.

 이를 개선하기 위해 1998년 소규모 프로젝트 사업비 전액을 별도 진료실 건축에 지원하였습니다.  이후로 결핵환자들은 따로 진료를 받음으로써 일반 환자들의 감염 위험성을 제거하였습니다.


 그리고 그는 매년 크리스마스 파티 및 산타할아버지 행사에는 병원직원들 뿐만 아니라 동포들을 초대하여 병원직원 자녀 및 한인자녀들이 함께 어울릴 수 있는 자리를 만들어 양국간의 우의를 다졌습니다.

 

 1963년 한국과 국교를 맺은 페루에 남다른 애정이 깊었던 그는 여러 가지 개선점을 제시합니다.

   최초 파견시 현지 언어에 대한 충분한 연수가 필요하고, 장기 근무자의 경우 전문분야에 대한 재교육 및 연수교육의 기회를 부여하고, 국제학회참석 등의 지원이 절실하며, 또한 소외된 환경에서 근무하는 만큼 재충전을 위한 일정시간이 있어야 한다.

 

  특히 KOICA의 지원 사업이나 연수생파견에 대한 추천에 있어서 수혜기관을 페루정부에 일임하여 미국이나 일본 등 기타 선진국의 대량 원조물자에 함께 섞여 우리 측에서 전혀 알지 못하는 곳에 혜택을 주기보다는, 이왕이면 정부파견의사단과 관련이 있거나 계속 유대관계를 유지할 수 있는 곳에 혜택을 줄 수 있도록 지정하여 조치하는 것이 사후관리도 용이하고 원조 효과 및 연수 효과도 극대화할 수 있다.

 

  그리고 의료직은 전문직으로서 직접 현지인 환자들을 오랜 기간 접하여 노하우와 언어능력이 축적되었기에 정년에 관계없이 업무수행능력에 의해 근무연장의 허락여부가 평가되었으면 좋겠다 

 

 

 

 

 

 

 

 

 

 

 

 

 




아래와 같은 그의 건의 사항은 보다 구체적입니다.

   KOICA에서 실시하고 있는 의료협력사업이나 무상원조사업은 국제사회에서 지위향상과 함께 우리 의료기자재 및 국산품의 우수성을 알릴 수 있는 좋은 기회이다.

 

  그러나 기타 선진국의 물량지원에 비하면 원조 규모가 양적으로 열세이다. 따라서 물적 지원만 하는 것보다는 의사, 치과의사, 봉사단원 등 인적자원의 지원을 통해 협력사업의 사후관리 및 원조효과의 지속성을 유지하는 것이 홍보효과 역시 극대화할 수 있는 효과적인 방법이다.

 

 꼬모스 제2 한국 · 페루 의료센터에는 정부차원에서 건축된 병원 본 건물 외에 1994년 개원당시 한인들의 모금으로 건축된 한인의료진을 위한 별도 진료병동이 유지되고 있다. 또한 이 진료병동에는 KOICA에서 기증형식으로 원조한 치과용 의자(Unit Chair) 및 치과 X-Ray 장비를 비롯한 고가의 각종 치과장비가 설치되어, 지난 5년간 현지의 인근 지역 주민뿐만 아니라 한인사회에도 양질의 치과진료를 제공하여 많은 호평을 받아왔다.

 단순한 의료협력의 차원을 떠나서 어렵게 마련된 이러한 진료병동, 의료시설 유지관리차원에서도 후임 의료진의 배치가 필수적이다.

 

  그리고 페루정부의 손이 미치지 못하는 많은 어려움들이 도처에 산재해 있다.

  따라서 이를 위해 가난퇴치, 질병퇴치, 거리아동 돕기 등을 목표로 설립된, 현지의 자생적인 민간단체 또는 NGO(비정부 기구)의 많은 역할이 있다. 이에 대해서 현지 사무소나 공관을 통한 적절한 평가를 통해 지원이 가능하면 좋겠다.

 

  현지 NGO에 대한 지원은 대개 참여하는 사람들이 많은 의욕들을 가지고 일을 하므로, 사전평가와 사후관리만 잘한다면 소규모 지원으로도 효율적이고 가시적인 효과를 기대할 수 있다.


 

 

 

 

 

 

 

 

 

 

 

 

 

 

 

 

 

 

 

 

 






 

치과 의사 김일경.

평화를 사랑하고 인정이 많은 사람입니다.

 

남들은 개업 일선에서 은퇴 할 나이에 젊은이도 하기 힘든 결정을 하고 페루로 떠난 그에게서 우리는 많은 것을 생각하게 됩니다.

 

 

출처  가난한 지구촌 사람들을 사랑한 한국의 슈바이처들 / 한국국제협력단(KOIC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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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하 글은 
아프리카 오지로 머나먼 남미의 산골로 젊은 시절을 온통 다바쳐 인류애를 실천하신 정부파견 의사분들의 감동적인 이야기

를 엮어 출판된 
"가난한 지구촌 사람들을 사랑한 한국의 슈바이처들"
내용으로, 발간 주체인 한국국제협력단(KOICA)의 동의를

얻어 건강천사에서 금요특집으로 소개드립니다.
 읽는 모든이와 자라나는 청소년에게 감동과 삶에 귀감이 되길 기원합니다.

 

 

 

베트남의 슈바이처   황혜헌

의사이기 전에 인간이다.

 

 

 

 

 

 

 


 인도차이나 반도 동부 상하의 나라 베트남(Vietnam).
 하얀 아오자이를 차려입고 야자 나뭇잎으로 만든 모자 농라를 날렵하게 쓴 어여쁜 처녀들이 시원한 야자수 그늘 아래 활짝 웃고 있는 모습이 떠오르는 나라.

 

 강대국 프랑스와 미국과의 처절한 전쟁을 두 번이나 치룬 참상의 나라.
 특히 정치경제적인 이해가 맞물려 파월한국군이 참전해야 하였던, 현대사의 비극을 나누어야 했던 나라.

 



 

  가정의학 전문의 황혜헌...

 

 

 그는 1953년에 태어나 1972년 서울대학교 의대에 입학하였지만, 학생운동에 연루되어 제적과 동시에 투옥되었습니다.

 이후 5년 동안 회사원 생활을 하다가 복학해서 11년 만에 의대 공부를 마쳤습니다. 

 

 1986년부터 정읍 아산병원에 18년간 근무하면서 소외계층에 대한 관심이 많았습니다. 그는 가난한 주민에게 무료진료활동을 펼쳤습니다. 그리고 2004년 KOICA(한국국제협력단) 정부파견의사로 베트남 하노이의 한국, 베트남 친선 병원에 부임하였습니다.

 

 한국, 베트남 친선병원 사업은 1995년부터 시작되었고, 2007년 한국, 베트남 친선병원 병동이 완공되었습니다.  내과, 소아과, 정형외과 등 6개 분야 진료소에 수술실, 입원실 그리고 통역원을 갖춘 국제종합 진료소였습니다.

 

 대형종합병원장이 어느 날 그 자리를 훌훌 털어버리고 개발도상국의 작은 병원으로 봉사활동을 떠났습니다.

 그의 의사로서의 직업관이 선합니다.
  의학은 목적이 아니다. 우리가 사는 방편이고 수단일 뿐이다.  

 우리는 의사이기 이전에 인간이고, 의사는 이미 기득권자가 아니다. 의학도 자기가 가진 달란트이다.  

 사회와 더불어 살고 선한 데 사용하여야 한다.

 

현지인과 의료상담을 하는 의사 황혜헌

 

 

 

 

 

  그는 하노이에 도착하여 일기를 씁니다...

 

 2004년 3월 30일 화요일.....
 대한항공 683편으로 하노이공항에 도착했다. 캄캄한 어둠과 공산국가라는 음울한 선입견이 나를 에워싸며 다가 온다.

케냐이던가, 아프리카의 황량한 공항에 도착한 이야기를 적었던 의사의 이야기가 생각난다.
국제협력단의 김복희 부소장이 마중 나와 주었다. 대우하노이호텔에 짐을 풀었으나 잠이 오지 않는다.

 

 다음 날....

 앞으로 근무할 한국, 베트남 친선병원에 책을 운반한 후, 성 바울병원 원장과 기획실장에게 인사한 후, 코이카 단원인 임상병리사 황승원씨, 베트남 소아과 의사 뇨, 간호사 러이, 통역 흐엉과 짱, 행정요원 하 등과 상견례를 했다

대사관을 방문, 공사, 참사관등과 만난 후 대사와 점심식사를 했다.

 

하노이의 수많은 오토바이가 매연을 품으며 나를 압도한다. 6성조를 가진 베트남어가 소음으로 나에게 다가온다.
얼마나 지나면 이것들에 익숙해질까?  호텔에 오니 벌써 한국에 두고 온 사람들이 보고파진다. 침대에 가만히 누워보니 무엇을 해야 할지 모르겠다. 생소한 약 이름을 정리해야하나, 옷을 정리하여야 하나, 밥을 먹으러 갈까?


한 달 전 답사차 여행사를 통해 관광객으로 왔건만 이제는 관광객을 보
는 입장이다.
밖은 번개가 치고 비가 오는데 창밖의 대하센터의 붉은 조명은 유행가가락이 생각날 듯, 하지만 내 심사는 무겁고 편치가 않다.

지금은 암울하게 보이는 이 도시가 언젠가는 따뜻하게 다가오리라 기대해본다.

‘대하’라는 말이 대우와 하노이를 합한 말이라고 하는데 나도 하노이와 친해질 날이 올 것이다.

 

 


 

  그는 그곳에서 남다른 활동을 펼쳤습니다.


 

 4년 동안 한국, 베트남 친선병원에서 월요일에서 금요일까지 현지인, 외국인 그리고 교민에 대한 진료가 5만 2천여 명을 넘었습니다. 주말을 이용하여 소수민족과 벽지주민을 위한 진료를 벌였습니다.

  월 3~4회 정도 시행하였고, 한국인이 세운 공장에 있는 근로자와 음식점 종업원을 중심 으로 진료 및 투약, B형 간염검사 및 예방접종, 일부 AIDS와 매독 반응검사, 구충제 투여를 시행하였습니다.

 이렇게 시행한 주말진료는 총 횟수가116회, 진료인원 5,800여 명, 간염검사 및 백신투여 5,700여 명, 구충제투여1,900여 명, AIDS와 매독검사는 2,600여 명이었습니다.

 

 2005년. 한국과 베트남의 교류가 잦아지면서 한국어의 필요성이 대두되었습니다.

 그는 병원 직원 6명과 세인트 폴 병원(St. Paul Hospital) 직원 2명을 시작으로 한국어 교육을 시작하였습니다.

 베트남 사람들 30명 정도 씩 모아 3개월 단위로 강습을 시작하였고, 초급 3개월, 중급 3개월 합계 6개월의 ‘무궁화 한글교실’을 운영하였습니다. 이후 한국어 강습은 귀국 때까지 6기의 졸업생을 배출했습니다.

 

 국제화시대의 추세에 따라, 베트남 처녀들이 한국남자와 결혼하는 수가 날로 늘어가고 있었습니다. 

 아름다운 베트남 처녀와 건강한 2세 출산을 위하여 서울 아산재단의 도움을 받아 AIDS와 매독 검사를 위한 시약을 공급받아 검사와 예방활동을 벌였습니다.

 

 그리고 베트남 전쟁 시 살포된 고엽제에 의한 직접적인 피해자 외에도 후유증을 가진 2~3세가 선천성 이상을 가지고 태어났습니다. 하루 종일 자기 머리를 때리는 아이. 매일매일 뼈가 부러지고, 머리에 물이 차서 큰 호박만한 아이. 하루에도 수차례 간질발작을 일으키는 아이. 15살인데도 몸무게가 8kg인 소년. 뇌수술 후 자극만 가면 웃는다는 아이 등 전쟁의 처참한 후유증이었습니다.  그는 베트남에서 인술을 펼쳤고, 한국과 베트남의 인연을 소중히 생각하며 그들의 아픔을 어루만졌습니다.

 

 그가 중학교에 다닐 때 집안이 어려워 미국 독지가한테서 약 2년 동안 매월 25,000원 정도의 도움을 받은 적이 있었는데, 그 액수는 그 당시 한 달치 생활비에 해당하는 돈이었습니다.

 그후 그가 12년 동안 선명회를 통해 베트남에 월 2만 원씩 후원하였는데, 그 액수도 베트남 시골 생활비에 해당하는 돈이었습니다.  그는 ‘아! 세상은 이렇게 돌아가며 갚아가는 것이구나’ 하고 느꼈다고 합니다.

 

의사 황혜헌의 진료를 받기 위해 기다리는 환자들



 



  4년간의 정부파견의사 임무를 마치고

 

 

 그는 경기도 도립의료원 포천병원장으로 근무하고 있습니다.

 만약 정부파견의사제도가 계속 시행되었다면, 아직도 그는 베트남에서 그들의 아픔을 헤아리고 있을 것입니다.

 

 어느 신문과의 인터뷰입니다.
 해외에서 어려운 사람들을 위해 봉사한다는 자체가 기뻤는데, 더 이상 기회를 주지 않아 안타깝네요.

 그는 처음 3개월 동안 베트남에서 적응하기에 무척 힘들었다고 이야기합니다.
 어느 의사는 아프리카 오지에서 목숨을 걸고 인술을 펼치는데, 이곳 베트남에서조차 버거워 하는 자신을 자책하였습니다. 그러나 업무기간 중 아픈 하루를 제외하고는 하루도 빠짐없이 환자와 함께 병마와 씨름하였습니다. 직접 환자를 상대하지 않았던 전직 병원장으로서는 벅찬 일이었습니다.

 

의사 황혜헌은 베트남을 사랑합니다.

한국에 돌아와서도 그 거리와 그 소음과 그 말소리와 그 살아가는 모습 들을 문득문득 떠올리고 있습니다.

 

 

출처  가난한 지구촌 사람들을 사랑한 한국의 슈바이처들 / 한국국제협력단(KOIC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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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하 글은  아프리카 오지로 머나먼 남미의 산골로 젊은 시절을 온통 다바쳐 인류애를 실천하신 정부파견 의사분들의 감동적인 이야기

를 엮어 출판된 
"가난한 지구촌 사람들을 사랑한 한국의 슈바이처들"
내용으로, 발간 주체인 한국국제협력단(KOICA)의 동의를

얻어 건강천사에서 금요특집으로 소개드립니다.
 읽는 모든이와 자라나는 청소년에게 감동과 삶에 귀감이 되길 기원합니다.

 

 

 

 미얀마의 슈바이처   최재성

 주민들과 친숙하게

 

 

 

 

 

 


  최재성은 중학교 때 마하트마 간디의 《진리를 찾아서》와 슈바이처의 《생명의 외경》같은 책을 읽고, 자신에게도 기회가 주어진다면 그런 일을 해보고 싶었습니다. 의대에 진학하면서 사람이 살면서 특이한 환경에서
남을 도울 수 있는 이런저런 일을 해볼 수 있다면 짧은 인생에서 의미 있는 일이라 생각하였습니다.

 

 그는 1955년에 태어나, 1974년 한양대학교 원자력공학과를 다니다 군제대 후 1978년부터 전북대학교 의대에서 공부하였습니다. 1988년 인제대학교 서울백병원에서 내과전문의를 취득하였고, 1990년까지 수원제일병원에서 내과과장으로 재직하다가, 그 후 수원에서 내과의원을 개원하였습니다.

 

 

 의사 최재성은 KOICA(한국국제협력단)의 정부파견의사 공고를 보고 지원했습니다.

 

 개원하고 있던 의원을 처리하는 것도 쉽지 않았습니다. 특히 집안이 모두 월남가족이었고, 이모가 자식 없이 혼자 사는 관계로 어머니가 돌아가시면서 이모를 모시라는 유언을 하였기 때문에 이모를 설득하는 것도 쉽지 않았습니다. 2001년부터 2005년까지 미얀마(Myanmar) 양곤병원(Yangon General Hospital) 내과(Liver unit)에서 근무하였습니다.

 

의사 최재성의 진료모습

 

 버마였던 미얀마.

 수도 양곤 시가지 북쪽 언덕 위에는 1453년에 세워진 둘레 426m의 광대한 정사각형 기단 위에 높이 100m의 쉐다곤 파고다가 황금색으로 찬연히 빛나는 불교의 나라. 영국과 전쟁을 수차례 벌였던 용감한 나라.

 

 

 미얀마는 그의 어린 시절 사회 환경과 유사하였습니다. 의료 환경도 낙후하여, 1960년대 초반의 한국을 보는 것 같았습니다.

 

 미얀마는 그들의 언어를 가지고 있었으나, 영국식민지이었던 까닭에 의사들이 영어를 잘하여 의사소통에는 문제가 없었습니다.

 사회주의 군사독재체제이며, 폐쇄적인 사회로 감시가 철저했는데, 병원에서 접촉하는 의사 이외의 다른 사람들을 마음대로 만날 수 없는 상황이었습니다.  개별 진료는 절대로 허용되지 않았고 병원에서 지정해주는 업무만 맡아서 해야만 했습니다.

 

 미얀마의 여름은 보통 섭씨 45도를 오르내리는 찜통이었는데, 그가 근무한 병원은 100년 이상 된 건물로 에어컨도 없는 열악한 상황이었습니다.  너무 더워 외부의 열기가 몸 안으로 들어올 정도였습니다.

 

 미얀마의 모든 지역에는 전기가 24시간 공급되지 않았고, 전기가 몇 시간 동안 공급되는 지역인지에 따라 월세가 확연히 달랐습니다.  저녁시간에 저녁을 먹고서는 모기나 해충이 많아서 산책이나 외출할 마땅한 곳이 없어 집에서 주로 생활을 해야 하는 불편이 있었습니다.

 

 밖에서 음식 사먹을 곳이 없고, 사먹을 돈도 없으므로 대부분의 미얀마 의사들은 도시락을 싸가지고 다닙니다.

 점심시간에는 옹기종기 모여 도시락을 펼쳐놓는데, 자신의 가장 좋은 반찬을 돌리며 상대방에게 나눠주는 것을 예절로 아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들의 반찬에는 진한 향신료가 있어 맛을 즐긴다기보다는 그냥 삼켜야 했습니다.  

 그들의 호의를 생각하여 즐거운 마음으로 식사를 마치지만, 그곳의 음식은 정부파견의사 임무를 마칠 때까지 익숙하지 않았습니다.

 

 

 미얀마의 국립병원은 돈이 없는 극빈층의 사람들이 오는 곳이었습니다. 

 

 영국에서 교육을 받은 유능한 의사들이 많았지만, 하루 벌어 하루를 근근이 보내야 하는 사람들에게 약값 등은 너무 버거웠습니다. 수술은 무료지만 마취약, 항생제, 진통제 등은 환자가 구입해야 하는데, 약값이 보통 한달 월급이상의 비용이므로 환자가 약을 구입하지 못하는 안타까운 경우가 많았습니다.  

 

의사 최재성이 병상의 환자를 돌보고 있다

 

 

 어떤 의사가 그를 찾아와 수술 받은 환자가 항생제를 살 형편이 못되니 약을 달라고 해서 예비로 비축한 주사제를 주었던 적도 있었습니다.  경제적 여유가 있는 사람들은 민간병원으로 가서 진료를 받았는데, 국립병원의 의사들이 따로 예약 받아 순회하면서 진료하는 시스템이었습니다.

 

 한국의 서울대학병원 같은 양곤병원에서 미얀마 의사와의 협진은 환자들에게 그저 상징적 의미였습니다.  오히려 수련중인 의대생들에게 선진화된 한국의 의료강의를 통해 공감대를 나눌 수 있었습니다.

 

 

 그는 일반적인 의료 활동으로 후진국을 지원하는 시대는 지났다고 생각하였습니다.

 

  미얀마는 영국식 의료시스템이라 의료수가가 너무 비싼 현대식 의료에 목맨 형국이었습니다.

  위내시경을 할 수 있는 병원이 전국에 고작 몇 군데 뿐이었고, 돈이 많은 사람들은 민간병원을 이용하였지만, 돈이 없는 사람들에게는 의료시설은 허울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미얀마의 경제력이 감당할 수 있는 값싸고 효과 좋은 침술과 근신경자극요법(IMNS)이나 일종의 에너지요법인 동종요법(Homeopathy) 같은 좀 더 특화된 영역의 의료를 지원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판단하였습니다.

 

  전통적 불교국가인 미얀마에도 한국에서 온 선교사가 많았습니다. 선교사들을 보면 별로 하는 일이 없는 것 같았습니다. 그러나 그 역시 시간이 지나면서 미얀마 주민들과 그냥 같이 사는 것이 그렇게 쉬운 일이 아니구나 하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그들과 친숙하게 지내는 것이 그들에 대한 봉사요 국제협력이라고 그는 말하였습니다.

 

 

 정부파견의사 임무가 끝나던 2005년 새해. 쓰나미가 남아시아를 휩쓸었습니다.

 

 미얀마의 이웃 나라인 태국에도 쓰나미가 밀려왔고, 태국 푸켓 위에 난민수용소가 있는 팡아주의 초등학교에서 서울에서 온 10여 명의 봉사단원과 난민들을 치료하며 뜻 깊은 시간을 보냈습니다.

 무차별 폭격을 맞은 것 같은 처참한 그곳에서 2주일 동안 다친 그들을 치료하며 인생의 의미와 감사를 배울 수 있었습니다.  열악한 환경이었지만, 야전침대에서 잠을 자며 그는 최선을 다하였습니다.

 

 의사 최재성이 KOICA에 보고한 문서를 종합하면, 3개월마다 외래 환자 297명, 입원 환자 371명, 내시경 진료 307명, 초음파 진료 62명 그리고 동포 진료 131명 정도를 담당하였습니다. 미얀마에는 한국인이 1,000명 정도 있었고, 동포를 위한 클리닉에서 진료하였습니다.

 

 그리고 한국의 대외경제협력기금인 EDCF(Economic Development Cooperation Fund)차관으로 건립중인 B형 간염 백신 공장이 진척됨에 따라 미얀마 보건부의 기대도 높아졌습니다. 그는 의학연구단체인 DMR(Department of Medical Research)를 조직하여 간염백신의 임상실험인 Clinical Trial(백신적응도 항체 생성률 및 합병증 발생률)을 DMR과 함께 공동 연구하였습니다.  미얀마 보건부의 백신 전문가 홍보 프로그램의 일종 인 B형간염백신 회의에 정책적인 도움을 주었습니다.

 

 

 

그는 미얀마에서의 정부파견의사 임무를 마치고 귀국하여 다음과 같은 제의를 합니다.

 

 후진국에 정부파견의사를 파견하여 보다 많은 환자를 치료하는 것도 중요하나, 그 나라의 보건정책에 참가하여 예방의학적 접근을 하는 것도 중요하다.  물론 WHO(세계보건기구)나 UNICEF(유엔아동기금)에서 이런 일에 관여하나, 이 단체에서는 알 수가 없는 소위 중간급 병원에서의 관습적으로 행해지는 약 투여와 진단 그리고 시술행위의 경우 많은 허점을 지니고 있다. 

 

 이런 것의 시정은 환자를 몇 명 더 진료하는 것보다 중요한 의미를 가지고 있다. 이런 문제에 대한 각 나라의 국제협력단 파견의사의 경험을 공유할 필요가 있다.

 

 양곤병원의 간장학(Hepatology) 분야에서 환자 상담치료외의 본인이 담당하고 있는 일 중에는 치료내시경이 있는데, 미얀마 인구의 20~30% 가 간염환자이고 이중 상당수가 간경화나 간암으로 진행된다. 소위 간경화로 인한 식도 위출혈 환자를 내시경적 혈관치료를 통해 지혈하는 것이다.

 

  미얀마에서는 치료내시경의 수련병원이 없으므로 본인이 이 부분을 담당했고 내과 수련의에 대한 교육을 하려고 여러 가지 노력을

했으나 내시경자체가 없고 지혈소모품이 없는데 무슨 배울 의욕이 있겠는가.  결론으로 각 지역 사정에 맞는 의료 시스템 적응이 필요하다는 결론에 도달했다.

 

 즉, 지역사정에 맡는 의료와 현대적인 의료시스템의 통합이 시급하다.

 그리고 최근에 KOICA에서 정부파견의사와 태권도사범 등 전문가 파견을 없애고, 병역면제 조건으로 파견하는 협력의사제도는 보편적인 진실을 이해하지 못한 결과라 생각된다.  일본의 대사관의사나 JICA(일본국제협력기구)의 정부파견의사 제도를 연구해 볼 필요가 있다.

 

 

 의사 최재성은 미얀마에서의 4년간의 정부파견의사 임무를 성공적로 마쳤습니다.

 

 귀국 후 한동안 너무 많이 달라진 한국의 사회와 의료시스템에 적응하는데 홍역을 치루기도 했지만 현재는 인천 나사렛 국제병원에서 내과 원장으로 재직하고 있습니다.

 

 미얀마에서의 국제협력단의사의 경험을 토대로 은퇴 후 개인적인 후진국 진출과 봉사도 부담 없이 계획하고 수행할 자신감도 생겼습니다. 즉, 후진국에 꼭 필요한 침술과 근신경자극요법 그리고 동종요법 같은 돈이 들지 않는 의료를 수행할 현지 의료인력 교육과 의료시스템의 개선을 위한 프로젝트입니다.

 

 그는 병든 불쌍한 환자를 찾아가 치료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병원의료체계의 제도개선이 보다 효과적이라 생각하였습니다. 그리고 진정한 생명외경의 정신으로 미얀마 주민과 친숙하게 잘 지내는 것이 봉사이고 협력이라 여겼습니다.

 

 

 

출처  가난한 지구촌 사람들을 사랑한 한국의 슈바이처들 / 한국국제협력단(KOIC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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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방글라데시의 슈바이처  이용만

  즐겁지 않으면 이일을 못한다.

 

 

 

 

 

 

 1992년 겨울. 아내와 함께 퇴근하던 의사 이용만은 반포대교를 건너면서 폭탄선언을 했습니다.

 해외에서 봉사의 삶을 살고 싶다....
 아내는 흔쾌히 동의했습니다.  

  

 

 로마의 케사르가 루비콘 강을 건넜듯이 한국의 이용만은 운명의 주사위를 던진 셈이었습니다.

 

 1993년 겨울. 그는 KOICA(한국국제협력단) 정부파견의사의 자격으로 방글라데시(Bangladesh)로 갔습니다. 부부는 한국을 떠날 때, 자녀들이 살던 아파트 한 채만 남겨놓고 모든 재산을 처분했습니다. 마치 한국으로 돌아올 생각을 않겠다는 배수진이었습니다. 1945년 해방둥이였으니, 하늘의 명령을 안다는 50을 바라보는 나이였습니다.


 이용만은 조선대학교 의대를 졸업하고, 고려대학교 의과대학에서 학업을 마쳤습니다. 서울에서 병원을 개원하면서 나름대로 보람 있고 편안한 생활을 하였습니다. 그런데 그는 의사가 되면 신앙인으로서 봉사하는 기회를 반드시 갖겠다고 서원했던 대학시절의 각오가 항상 마음에 남아있었습니다.

 

 정부파견의사로 파견되기 전에 그는 내심 사전 준비를 하고 있었습니다. 방글라데시를 두 차례 방문했는데, 이 사실을 알게 된 누나가 여행경험에 대하여 묻자 찍은 사진을 보여 주었습니다. 그런데 뜻밖의 인물이 사진 속에 있었습니다.

 

미국인 선교사 카딩턴 박사였습니다.

 그는 한국전쟁직후 혼란기에 자궁외 임신에 의한 심한 출혈로 죽음을 기다리고 있던 상황에서 수술을 해 누나를 살린 생명의 은인이었습니다. 그는 임기를 마치고 귀국하여 연락이 끊어져 생사조차 몰랐는데 그 고마운 카딩턴 박사를 의사 이용만이 방글라데시 여행 중에 같이 사진을 찍게 되어 누나에게 소식이 전해졌던 것입니다. 운명이란 것이 그를 이끌었던 모양입니다.

 

 

 방글라데시 수도 다카 근교 통기병원 내과에서 그는 인술을 펼쳤습니다.

 

 외국인 의사에 대한 현지 의료인들의 배타적인 상황에서 성공적인 활동을 하였으며, 일과 후에는 교민들을 위한 예방접종 및 각종 상담에 응하였습니다. 그가 KOICA에 알린 실적보고서에는 무려 40여 종에 달하는 질병을 진료하였으며, 매 분기마다 3,000명에 가까운 환자를 만났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방글라데시는 이슬람국가이기 때문에 환자를 진찰할 때 옷을 입은 채로 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한동안은 어려움을 겪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의 다정한 인술은 꽃을 피웠고, 그의 병실에는 환자들이 끊이지 않았습니다.

진료 시작은 아침 9시인데 7시부터 기다리고 있었고, 바쁜 일정을 소화하다보면 화장실 갈 시간도 없을 정도였습니다.

환자들도 오래 기다리다 보면 화장실에 가야 함에도 불구하고 새치기를 당할까 봐 참고 기다리다가 병실에서 실례를 하는 경우까지 생겼습니다.

 

 의사 이용만이 묵묵히 진료하던 중에 언제부터인가 여자 환자들이 대다수를 이루는 상황이 전개되었습니다.

 그 이유를 곰곰이 생각해 보니 일부다처제 아래서 여성들이 겪는 스트레스와 고민에 대해 귀를 기울여주다 보니 큰 위안을 받았기 때문이었습니다.

 

 방글라데시에서 근무한 지 3개월이 지난 무렵, 병원 복도에 누워 있는 세 살가량의 아이를 발견하였습니다.

 버려진 아이였고, 한눈에 보기에도 영양실조였습니다.  

 아이를 병실로 옮기고, 우유와 햄 그리고 빵을 사다가 옆 침대의 여인에게 먹여줄 것을 부탁했습니다.

일주일 쯤 지나 아이를 찾아가 상태를 보니 전혀 나아지지 않았습니다. 알고 보니 그 부인이 아이에 게 줄 음식을 먹었던 것입니다.

 

 당황한 그는 직접 아이에게 음식을 주기 시작했고, 한 달가량 지나면서 아이가 뚜렷하게 건강을 회복하였으며, 주변에서는 아이를 양녀로 삼을 것을 권유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법적으로 불가능했습니다.

 몇 달이 지나 한 고위공무원이 입양하겠다며 그의 의향을 물어와 아이의 장래를 위해 흔쾌히 수락했습니다.

 훗날 양부모와 함께 가끔 병원을 방문한 그 아이는 공주처럼 변해 있었습니다. 그는 큰 보람을 느꼈습니다

 

 

 

 3년을 근무한 후 방글라데시 정부로부터 비자연장을 받지 못해 네팔(Nepal)로 옮기게 되었습니다.

 

그가 네팔정부로부터 지정받은 국립 박따뿔(Bhaktapur)병원은 어쩌면 본격적인 봉사와 희생의 마당이었습니다.

네팔은 비록 후진국이지만 국가가 보건예산을 전체 예산의 7%를 배정할 정도로 큰 관심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네팔의대에서 배출되는 의사들의 사회적 지위는 매우 높았습니다.

 

 네팔 사회에서 의사들은 가장 우수한 인재로 간주되며, 경제적으로 넉넉하고 권력층과 연결된 집안 출신들이 대부분이었습니다.

 그리고 의과대학 학자금은 너무 비싸고, 가난한 집 출신들은 장학금 수혜가 많지 않은 여건에서 공부를 하였기 때문에 엘리트의식
과 자존심이 강하였습니다.

 어쩌면 신성한 인술을 펼치는 의사들이 이미 폐지된 카스트 제도의 영향을 받고 있는 것처럼 보였습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외국인 의사에 대해 차별적이었고, 병원의 환경은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참담하였습니다.

 새로운 병동도 지어졌고 KOICA의 지원으로 시설도 개선되었지만, 그가 진료를 처음 시작할 때만 해도 분만을 하기에는 너무 시설이 열악하여 산모와 신생아 모두에게 위험해 보였고, 진료 중에 정전도 잦았습니다.
 히말라야 산맥의 작은 나라 네팔에서는 병이 생기면 무속인, 민간요법, 시골 약국이나 보건소 그리고 마지막으로 병원을 찾았습니다.

 

 70대 할머니의 종양을 제거한 수술은 하나의 전설적 사건으로 기록되고 있습니다.
 배가 산처럼 솟은 노인을 초음파로 진단해보니 커다란 물혹이 자리 잡고 있었습니다. 수술을 권유했지만 ‘70이 넘은 내가 얼마나 더 살겠다고 수술하겠느냐’며 거부하는 환자를 설득해서 18Kg이나 되는 종양을 들어냈습니다.

 수술 받은 후 퇴원했다가 세 손녀와 함께 그를 찾아와 이제는 살 맛이 난다고 고마워하였습니다.

 이 환자가 수술 받은 후 의료진과 함께 찍은 사진과 들어낸 물혹 사진은 지금도 그 병원에 걸려 있습니다.

 

 의사가 부족하다 보니 자신의 전문분야가 아닌 수술을 감행한 적도 있습니다.

 한번은 응급실로 환자가 들어왔는데 유방염이었습니다. 응급실의사는 환자를 카트만두 시내에 있는 병원으로 이송하자고 제안했지만, 그가 만류했습니다. 수술을 성공적으로 마치자 산부인과과장은 그를 유방농양치료전문가(Breast Abscess Specialist)라 부르면서 부러워하였습니다.

 

네팔에서는 남자들이 또삐를 머리에 쓰고 다니는데, 오직 또삐만을 만들어 살아가는 환자가 선물한 것을 그도 쓰고 다녔습니다.

처음에는 환자들이 보통 높이보다 두 배 정도 높은 것을 주면서 당신은 반드시 이걸 써야한다고 해서 영문을 몰랐는데 알고 보니 그것은 상류층이 쓰는 것이었습니다. 그렇지만 그는 이를 극구사양하고 보통 사람들이 쓰고 다니는 낮은 또삐를 쓰고 다녀 더욱 큰 존경을 받았습니다.

 2003년은 박따뿔병원 개원 100주년이었습니다.

 

 네팔 왕실은 의사 이용만에게 각별한 인사말을 담아 감사패를 전달하면서, 그의 헌신적인 의료활동을 치하하였습니다.
 이용만은 KOICA의 전적인 지원을 받아 2009년에 개원한 한국·네팔 친선병원에서 활동하였습니다.

 박따뿔병원에서 진료 받던 환자가 멀리 떨어진 이 병원까지 그를 찾아오는 경우가 적지 않았습니다.

 

 

 

 남편이 노래를 하면 아내도 따라서 부른다고 했던가요. 이용만의 부인 박영례도 묵묵히 남편을 돕다가 봉사에 나섰습니다.


 2002년, 2층짜리 주택을 임대해 고아원 ‘시온의 집’을 열었습니다. 부모가 없거나 결손가장 출신이며 교육을 받을 수 없는 원거리 시골출신 아이 12명을 자식으로 받아들였습니다.

 못 먹고 못 배우던 아이들이 달라졌습니다. 그들은 회계사와 의사 등의 꿈을 키웠습니다. 그들은 이용만 의사 부부가 없었다면 학교에 가지도 못하였을 것이니, 자신들의 인생이 완전히바뀌었다고 말했습니다.

 

 특히 ‘시온의 집’ 어린이를 지도하다가 의과대학에 합격한 시골청년에게 이용만 부부는 입학금부터 졸업할 때까지 학업에 필요한 모든 비용을 후원하였습니다. 그 가난했던 청년은 의대를 졸업하고 한국에서 6개월 동안 연수도 받았습니다. 그리고 현재 의사가 부족한 시골 주민들을 위하여 일하고 있으며, 이용만 부부를 아버지 어머니라 부르고 있습니다

의사 이용만과 네팔인 양아들    

  

 그가 방글라데시로 가던 해 집안에는 고등학교 3학년인 대학입시생이 있었습니다.

 3남매를 남겨두고 부인과 늦둥이인 막내만을 데리고 떠났습니다. 어찌 보면 자식에게는 무심한 부모였습니다.

 이용만은 지금도 20년 전 양복을 입고 다녀서 주위에서는 유니폼이라고 합니다.  아내는 둘째 셋째 딸 결혼식에 친구와 시댁 조카 한복을 빌려 입었습니다.  그들 부부는 물질적으로 가난하지만 마음으로는 누구도 부럽지 않은 부자였습니다.

 

 그는 2000년 적십자 박애상 금상, 2005년 KOICA 표창 그리고 2008년 외교통상부가 후원하고 KOICA와 KCOC(한국해외원조단체협의회)가 공동 주최하는 대한민국 해외봉사상 대통령상을 수상하였습니다.
 2008년 KOICA에서 거행된 제3회 대한민국 해외봉사상 대통령표창을 수상하면서 그는 소감을 이렇게 말했습니다.

 남들에게 알려지지 않고 말없이 열심히 봉사활동을 한 사람들에게 죄송하고 부끄럽다.

 의사 이용만의 자랑스런 해외봉사 이야기는초등학교 6학년 2학기 사회교과서에 실려 있습니다.

 

 20년 세월.

 즐겁지 않으면, 이 일을 못한다고 그는 겸손하게 말합니다.

 

 

출처  가난한 지구촌 사람들을 사랑한 한국의 슈바이처들 / 한국국제협력단(KOIC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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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 이야기를
엮어 출판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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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용을, 발간 주체인 한국국제협력단

(KOICA)의
동의를 얻어 건강천사에서 금요특집으로 소개해 드립니다. 읽는 모든이와 자라나는 청소년에게 감동과 삶에

귀감이 되길 기원합니다.

 

 

 

   미얀마의 슈바이처  이영식

   의료행정 제도개선을 위하여

 

 

 

 

 

인도차이나 반도와 인도대륙 사이에 있는 나라.
군부독재에 맞서 민주화운동을 벌인 아웅산 수지여사로 유명한 나라.
발목까지 내려오는 치마모양의 전통의상 론지를 차려입은 남녀들.
특히 1960년대 동대문운동장에서 버마와 한국 축구팀 청룡이 억수같은
비가 오던 날, 진흙탕 수중전을 벌여 한국인에게 인상 깊던 나라.
미얀마에 한 의사가 있었습니다.

 

 

바로 이영식입니다.

 

그는 1955년에 태어나 1974년부터 연세대학교 의과대학에서 공부하였습니다.

1996년 KOICA(한국국제협력단)의 정부파견의사로 미얀마(Myanmar) 양곤종합병원에 파견되었습니다.
의사 이영식의 미얀마에서의 정부파견의사 활동은 헌신적이면서 체계적이었습니다.

 

 미얀마는 치안이 비교적 좋으며 국민성도 유순하고 외국인에 대해 우호적이었습니다. 그리고 우리나라와 기후풍토가 전혀 다르므로 거기에 적응할 수 있는 기본적인 건강이 요구되었습니다.

 

 경제 수준에 비해서 주택임대료나 전기와 전화세는 터무니없이 높았습니다.

 특히 외국인에 대해선 모든 세금, 공공요금, 병원치료비, 숙박비, 항공료 등에 차별을 두었습니다. 그리고 오랜 사회주의 체제로 정부기관의 직원들은 관료적이고 권위적이며 부서간의 협조가 잘 안되었습니다.

 

 미얀마의 의료체계 자체는 영국의 영향과 사회주의 국가로서 법적으로는 조직이 잘되어 있으나, 의료기자재와 조제약이 턱없이 부족하였습니다. 경제적 여유가 있는 사람들은 개인병원에서 비교적 양질의 진단을 받고 처방을 받아 약품을 구입해서 치료할 수 있으나, 대다수 가난한 주민들은 열악한 공공의료기관 시설에서 진단을 받고 처방을 받더라도 생활수준에 비해 너무 비싼 약을 구입할 능력이 없었습니다.

 

 1996년에 부임한 그는 언어에 익숙하지 않아 단독 진료를 하지 못하고 영어를 잘하는 원주민 의사 혹은 간호사의 도움을 받아야 했습니다. 낮에는 의료 활동에 전념하였고, 진료가 없는 밤에는 언어습득을 위해 노력하였습니다.

 주경야독인 셈이었습니다.

 

 그곳에서의 활동에서 가장 큰 문제점은 습도가 높은 우기에 각종 바이러스와 알레르기 질환의 만연이었습니다.

 

 그는 청결한 주거 문화와 식생활 습관의 개선에 관심을 기울였고, 또한 무의촌 진료에 있어서 진료소문을 듣고 찾아오는 비교적 적극적인 환자보다는 오히려 찾아오지 않는 이들 중에 더 만성적이고 치료 효과가 높은 감염질환자들이 많다는 점을 발견하여 그는 기다리는 진료보다는 찾아 내어 치료하는 방식을 지향하였습니다.

 

의사 이영식의 무의촌 진료 모습

 

 그곳 무의촌에는 만성중이염을 앓고 있는 어린이들이 많았습니다. 말을 배워야 할 시기에 중이염으로 인한 청력 저하로 말을 배우지 못하여 평생 장애인으로 지내야 했습니다. 그런 어린이들을 찾아내어 염증을 치료하고 필요하면 보청기를 착용시켜 청력을 향상시켜 줌으로써 적은 비용으로도 본인에겐 엄청난 도움을 줄 수 있는 지원 방법을 모색하였습니다.

 

 그는 예방접종도 활발히 벌였습니다.


 1996년도 3/4분기에는 간염, 홍역, 소아마비 등 예방접종을 비롯하여 미얀마인 외래환자 282명과 입원환자 176명을 치료하였으며, 동포 220명을 진료하였습니다. 또 교회인 Living Water Dragon Church와 장님 마을 그리고 고아원인 Inya Boy’s Training school을 찾아다녔고, 무의촌에서 720여명 의 환자 진료에 적극적이었습니다.

 

 특히 고아원에 대한 정기적인 진료로 개인 위생 및 영양상태 개선과 질병치료에 만전을 기하였습니다.
그리고 C형간염 감염에 대한 인식부족으로 수혈로 인한 C형 간염 감염률이 높아 공혈자들에 대한 질병이 발생하는 특정 지역에서 바이러스 양성률을 조사하였습니다.

 

 미얀마 보건부의 지원을 받아 전체의 유병률 및 위험인자를 조사하여 미얀마 보건정책에도 기여하였습니다.

 

<미얀마내 수혈액의 C형 간염 양성률 및 C형 간염환자의 질병경과에 관한 연구>를 소규모 프로젝트로 수행하였으며, 보고서에서 미얀마의 열악한 공중위생 상태와 높은 간질환 환자 비율, 수혈용 피에 대한 검사가 행해지지 않고 있는 점을 지적하였습니다.

공혈자들에 대한 C형 간염 바이러스 양성률을 조사함으로써 미얀마 전체의 유병률을 알아내고 위험인자를 조사하고 양성자들에
대한 추후관찰을 통해 질병의 경과를 밝혀 미얀마 보건정책 결정에 도움을 주었습니다. 일반적인 C형 간염 양성자의 자연 경과를 알아 내어 학술적으로도 기여할 수 있도록 연구를 시작하였습니다.

 

 그 결과 검사가 완료 된 414개 샘플 가운데 47개 샘플이 C형간염 항체 양성반응을 보여 11.4%의 양성률을 보였으며, 헌혈자의 경우 대개 경제적으로나 사회적으로 상류층에 속하는 이들이므로 일반인들에 있어서는 더 높은 비율로 나타 날 것이라 예상하고, 실제로 중대한 국가적인 보건문제임을 지적하였습니다.

 

 그의 지속적인 예방활동에 힘입어 원래 2~3%로 예상되었던 미얀마 수혈혈액의 C형간염 항체 양성률이 무려 12%에 가까워졌고, 이런 보건위생은 국가적으로 중대한 문제로 대두되었습니다. 그 결과 수혈혈액에 대한 검사를 조기에 고려하게 되었습니다.

 

 미얀마에서도 AIDS가 큰 문제였습니다.  태국과 국경을 이루는 북쪽지방의 경우 태국으로 넘어가 매춘에 종사하다 귀국하는 여성들이 많아 이 사람들을 통해 AIDS가 빠른 속도로 확산되었습니다.

 AIDS에 대한 교육과 홍보가 제대로 되어있지 않았으며 지역적으로 마약생산지와 겹쳐, 불결한 주사기 등을 통해서도 확산이 가속화되고 있었습니다.

 

 비공식적인 조사에 의하면 미얀마 북쪽 국경지역의 마약상습자를 위한 수용병원에서 입원환자를 대상으로 AIDS에 대해 검사한 결과 75%가 AIDS에 감염되어 있을 정도로 심각하며, 미얀마가 경제개방을 확대해가면서 유흥업소가 늘어나고 그에 따라 매춘에 종사하는 사람들도 늘어나고 있어 시급한 대책이 요구된다고 그는 지적하였습니다.

 

 1960년대의 우리나라처럼 미얀마에도 거의 전 인구가 기생충에 감염되어 있다는 사실을 지적하며, 경제적 여유가 있는 일부 사람들만이 개인적 으로 구충제를 복용하는 형편임을 알리고 분변처리를 비롯한 주거양식의 근본적인 개선과 구충제복용 캠페인을 제안하였습니다.  

 

 특히 회충에 감염되었을 경우 탄수화물의 흡수율이 감소하는 것을 밝혀내 회충퇴치에 대한 학술적인 근거를 마련하였습니다. 그리고 회충감염과 쌀 탄수화물 흡수 및 장내 투과성에 대한 연구를 제도적으로 접근하기 위하여 지원방안을 제안하였습니다.
 그리고 내시경 시술 및 초음파가 극히 제한된 수의 의사들에 의해서만 행해지고 있어, 기술전수를 통해 미얀마의 현대화된 의료체계를 세웠습니다.


 미얀마 북부지방에 자생하는 갯질경이(Plantago Major : 이미 동물실험에서 궤양치료 효과가 확인된 약초)라는 야생약초를 소화성 궤양 치료에 적용해 보려는 임상연구를 시작함으로써 결과에 따라 대학이나 기업연구소와 공동으로 신약을 개발할 가능성이 매우 클 것으로 생각하였습니다.

 

plantago major라는 야생약초의 생태조사를 위한 조사모습

 

 

 그 외에 민간에서 흔히 사용하며 약효가 거의 확실히 인정되고 있는 항결핵제, 항생제, 혈당강하제가 함유되어 있어 연구진과 공동 연구할 경우 매우 전망이 밝을 것으로 예상하였습니다.
 야생약초 갯질경이의 소화성 궤양에 대한 연구 등을 자비를 투자할 수밖에 없었는데, 거기에 대한 지원을 비정기적으로라도 요청할 수 있는 제도를 모색하기도 하였습니다.

 

 성실하고도 헌신적인 자세와 투철한 사명감으로 무의촌 진료와 한인병원 운영 등 자원봉사 활동 등으로 한국과 미얀마의 관계 강화와 한인사회의 어려움 해결에 크게 이바지하였습니다.

 

 의사 이영식은 정부파견의사 임무를 성공적으로 마치고 귀국하면서 체계적이고도 건설적인 해법을 제시합니다.

 

 일상적인 의료 활동이 보건행정에 도움이 되겠지만, 국가적 보건정책 결정이나 공공위생의 개선, 질병예방에 더 큰 비중을 두고 노력을 기울이는 것이 실질적으로 미얀마에 유익할 것이다.

 경제적 사정 때문에 첨단의학에 투자할 수 있는 여력이 미미하고, 대 다수의 국민들은 민간요법에 의존하고 있는 현실을 감안해서 미얀마의 전통의학과 민간요법에 대한 공동연구가 큰 도움이 될 것이다.

 

 자연스럽게 미얀마 교민들을 진료하게 되는데 교민진료 자체를 제도화해야 하며, 교민들을 위해 상담하고 치료하기 위해 시간과 노력을 자발적으로 투자하는 것은 당연하지만, 필요한 약제와 병원 임대료 그리고 간호사 고용비용 등등의 제반경비를 자체적으로 부담하기엔 장기적인 관점에서 보면 무리가 있다.  

향후 교민뿐만 아니라 출장자와 관광객들이 많이 늘어날 것으로 생각되는데 제도화된 교민진료 체계가 필요할 것이다.

 

의사 이영식은 미얀마에서 주민들에 대한 성실한 의료 활동은 물론 국가보건행정의 체계를 세운 점이 특이합니다.

그는 많은 일을 하였습니다.  그가 한국에서 익힌 의학지식을 충분히 활용하기에는 의료시설이 너무 빈약하였으나, 반면 조그만 노력이나 비용으로도 매우 큰 효과를 올릴 수 있었고, 그 노력으로 미얀마 주민들에 큰 도움을 주었습니다.


 

출처  가난한 지구촌 사람들을 사랑한 한국의 슈바이처들 / 한국국제협력단(KOIC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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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국민건강보험공단
이하 글은  아프리카 오지로 머나먼 남미의 산골로 젊은 시절을 온통 다바쳐 인류애를 실천하신 정부파견 의사분들의 감동적인 이야기를 엮어 출판된 "가난한 지구촌 사람들을 사랑한 한국의 슈바이처들" 내용을, 발간 주체인 한국국제협력단(KOICA)의 동의를 얻어 건강천사에서 금요특집으로 소개해 드립니다. 읽는 모든이와 자라나는 청소년에게 감동과 삶에 귀감이 되길 기원합니다.

 


 

  베트남의 슈바이처  김시찬

  베트남의 상처를 어루만지다

 

 

 



 

 

 

 

자유통일 위해서 조국을 지키시다
조국의 이름으로 님들은 뽑혔으니
이름 맹호부대 맹호부대 용사들아
가시는 곳 월남~땅 하늘은 멀더라도
한결같은 겨레마음 님의 뒤를 따르리라
한결같은 겨레마음 님의 뒤를 따르리라.

 

 

  1965년 부산항....

 

거대한 군함에 승선해 있는 맹호부대 용사들을 향해 가족과 학생 그리고 시민들은 손에 손에 태극기를 뜨겁게 흔들었고, 대한민국 국민들은 그들의 무운을 간절히 기원하였습니다.
학교에서는 수업이 끝나면 맹호부대, 청룡부대, 백마부대 노래를 배웠습니다.

이역만리 월남 전장으로 떠나는 대한민국 국군아저씨들의 백전백승과 무사귀환을 염원하면서 불렀습니다.

미국의 군사적 논리였던지 한국의 경제적 복안이었던지 그런 것은 염두에 두지 않고, 우리나라 국군 아저씨들을 위해 그냥 힘차게 불렀고, 월남에서 베트콩과 싸워 이겼다는 소식이 전해지면 마냥 환호하였습니다.

 

세월이 한참 지났는데도 그 노래들을 들으면 왜 그런지 가슴이 울컥합니다.
전쟁은 끝나고, 지금 베트남(Vietnam)과 한국은 사이좋은 나라입니다.
반세기 전에는 군인들이 총칼을 들고 죽기 살기로 싸우러 갔지만, 지금은 의료진들이 청진기와 약품을 가지고 그곳을 찾습니다.
머나 먼 곳 베트남에서 의술을 펼치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 이름 김시찬....

 

그는 1957년에 태어나 1983년 연세대학교 의과대학에서 내과를 공부하였습니다.

1995년 베트남 하노이 세인트 폴 병원(Saint Paul Hospital)에 KOICA(한국국제협력단) 정부파견의사로 뽑혔고, 1996년부터 개원한 한국·베트남 우정병원 Korea Clinic(한국병원)에서 근무하였습니다.

 

정부파견의사의 임무를 끝낸 지금도 한 결 같이 베트남의 환자들을 돌보고 있습니다.
독실한 크리스천인 그는 학창시절부터 의료봉사에 남다른 열정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1992년 의과대학 동기 10명과 함께 인도차이나에 관심을 갖자는 좋은 이웃 모임인 GNA(Good Neighbors Association)를 조직하였습니다. 의료 인력도 절박했고 의술환경도 최악이었던 캄보디아에서 3년 동안 봉사활동을 벌였습니다.

 

1996년. KOICA의 지원을 받아 세인트 폴 병원의 협력 아래 기자재와 약품을 보강하여 Korea Clinic을 출범시켰습니다.

그런데 그곳을 찾는 환자의대부분은 한국인으로 정부파견의사의 본래 취지와는 맞지 않았습니다.
국민소득이 낮은 베트남인들에게는 병원을 찾을 여력이 없어서 그는 기본 의료수가를 하향 조정하여 베트남 환자에게도 실질적인 도움이 될 수 있는 길을 마련했습니다.

 

 

 

 

 

  그들의 의료현실은 참담하였습니다.....

 

가난도 문제였지만, 의사들의 수준이 더욱 문제였습니다.

의사 봉급이 월 50달러이므로 의욕이 현저히 떨어져 있기도 하였지만, 그들 대부분은 환자의 치료보다는 선진국의 발전된 기술만을 배우고 싶어했습니다.

갈 곳이 없는 환자들은 병원을 찾기보다는 약국에서 엉뚱하고 값싼 약을 선택해야만 하였습니다.

 

현대화된 의료 장비는 생명선이나 다름없습니다. 첨단 기능의 장비 보유가 치료의 질을 좌우합니다.

의욕적으로 시작한 Korea Clinic에는 한국에서는 흔한 CT(컴퓨터 단층촬영)나 MRI(자기공명영상) 한 대가 없었습니다.

그는 돼지저금통에 동전을 모으듯, 1년 동안 병원 운영비를 절감해 초음파와 전자내시경 기기를 구입하였습니다.

 

 

 

 

  Korea Clinic은 성공적이었습니다.....

 

그의 성실한 의술 활동과 깨끗한 의료시설 그리고 올바른 치료약의 선택 및 질환에 대한 자세한 설명 등으로 인해서 Korea Clinic의 명성은 날로 높아졌습니다.

1999년도에는 연간 약 13,500여 명의 환자를 진료하였고, 다양한 인도주의적 활동을 통해서 베트남 사람의 사랑을 받았습니다.

는 베트남의 병든 사람을 위해 심장학 분야를 추가로 공부하였습니다.

 

그가 KOICA에 전한 활동보고서에 따르면, Korea Clinic에서의 활동은 일반진료 업무가 주종이었습니다.

그곳을 이용하는 환자 중 점차 베트남 환자들이 늘어가는 추세이며, 이는 Korea Clinic이 독자적으로 의료수가를 베트남 사람에 한하여 받지 않거나 병원에서 결정한 수가보다 낮게 책정하여 시행하였기 때문이고, 또 여기에 다녀갔던 사람들의 소개로 오는 경우가 많다는 내용이었습니다.

 

정부와 민간 차원에서 한국의 지원이 필요합니다.

그는 늘 이런 생각으로 베트남을 도우려고 했습니다.
의사 김시찬은 이제는 KOICA 정부파견의사가 아니라, 베트남을 사랑하는 의사로 거듭났습니다.

 

 

 

  인터넷에서 '의사 김시찬'하면 이런 기사가 뜹니다....

 

《KBS WORLD》와 《월간 안과정보》의 내용을 정리해 봅니다.

2005년 4월. 20여 년 전 김시찬이 진정한 의사의 길을 걷겠다고 마음먹으면서부터 추진한 한국병원의 기공식이 있었다.

하노이 외곽 릉 쩌우마을이다. 건축은 약 4개월 정도 소요되고, 2층 건물로 독립적인 운영체제를 갖추고 있다.
2명의 베트남 의사 등 모두 14명으로 진료를 시작할 한국병원은 지역사회 예방의학에도 힘을 기울일 것으로 알려졌다.

 

이 지역은 하노이 시내에서 북쪽으로 35km 떨어진 곳으로 농촌 지역이며 또 가장 가난한 마을이다.

주로 빈민들을 대상으로 하는 무료 클리닉이고 한국의 NGO들이 도울 예정이다.

의사 김시찬의 숨은 노력은 베트남 정부의 호응으로 20년 장기계약을 이끌어 냈다.

 

하지만 의료 인프라가 워낙 부족해 각종 의료 기자재나 기타 시설에 대한 준비는 턱없이 부족한 상황이다.

때마침 뜻있는 동포들이 정성을 담아 각종 장비를 보내와 기초적인 진료에는 차질이 없을 것으로 보인다.

그는 베트남에서 봉사활동을 하면서 세운 목표가 어떻게 하면 이 사람 들을 조건 없이 사랑할 수 있을까 하는 것이었다.

그는 선천성 심장병을 앓는 아이 2명을 한국으로 데리고 와서 수술을 도운 적이 있다.

 

대한안과의사회는 2010년 12월. 베트남 하노이의 Hanoi Red Cross Sunny Clinic을 방문하였는데,  의사 김시찬이 안과진료를 할 의사를 파견해달라는 협력요청에 따라 의료봉사활동 차원에서 자매결연 후 안과 부문을 지원하기로 약속했다.

대한안과의사회에서는 우선 안과용 세극과 수술 현미경을 지원, 안과를 개설하기로 했다.

그리고 자원봉사를 원하는 안과 의사를 주기적으로 파견하여 연속적인 안과 진료가 이루어지도록 할 예정이다.

 

그밖에도 2010년, 무료개안수술로 유명한 실로암 안과병원의 베트남 해외진료 시에는 사전 준비 단계부터 도왔으며, 수술 진행시 통역 등을 담당하기도 하였습니다.

 

 

 

 

  의사 김시찬은 지금도 베트남에서 의료선교 및 봉사활동을 벌이고 있습니다....


의사 김시찬은 지금도 베트남에서 의료선교 및 봉사활동을 벌이고 있습니다.
그에게서 의사는 돈이라는 통념이 사라진 지 이미 오래입니다. 가끔 한국으로 날아와서는 어떻게 하면 베트남을 보다 잘 도울까 하는 생각으로 노심초사입니다.

 

가난해서 병을 얻고, 그 병을 끝내 떨쳐내지 못하고 살아가는 불쌍한 사람도 많지만, 전쟁으로 인한 후유증과 정신불안증세로 살
아가는 사람들이 아직도 많다는 박애주의에서 우러나온 사려 깊은 생각을 가지고 있는 의사입니다.

 

 

soc con clinic에 기자재 및 약품을 전달하는 의사 김시찬

 

 

출처  가난한 지구촌 사람들을 사랑한 한국의 슈바이처들 / 한국국제협력단(KOIC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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