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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통/살아가는 이야기

캔 고리에 감전된 남자가 사랑에 빠진 사연


      까만 꽃씨 몇 알이 서랍장 속을 뒹군다.

      버릴까 하다가 아이들 관찰용으로 키우면 되겠다 싶어 작은 화분에다 심었다.


  

날마다 물을 주며 어떤 싹이 올라올까, 땅을 유심히 살폈다. 여러 날이 지나 여린 싹이 흙을 밀어 올리는가 싶더니 어느새
줄기가 올라와 많은 잎을 달고 꽃분홍색의 작은 나팔을 연주한다. 분꽃이었다. 아이는 조그만 씨속 어디에 큰 줄기와 꽃이
들어 있었냐고 신기해 하며 맑은 눈망울을 굴린다.

그때 초등학교 저학년이었던 아이는 호기심이 많아 "왜 그래요?" 를 입에 달고 살았다. 짧은 지식으로 철학까지 더해가며
설명하느라 진땀을 뺐던 기억이 난다.
중고등학생이 되어서는 궁금해 하던 여러 현상들을 사소한 것까지도 스스로 알아내
오히려 엄마에게 설명을 해주곤 했다.

지금은 능청스럽게 엄마의 과거를 들추어내 은근히 놀리기도 한다. 그 옛날 콩알만한 꽃씨 속의 비밀은 알겠는데 캔 고리로
인해 언니랑 자신이 태어난 건 이해할 수 없다며 장난스럽게 설명을 요구한다. 이십 년도 더 된 일을 누가 사랑의 코드를
먼저 연결했는지 고백하라고 조른다.

우리 부부는 서로 아니라고 발뺌을 한다. 단지 연결되어 있는 걸 잡았을 뿐이라고. 그래야 언짢은 일이 생겼을 때 상대방
탓으로 돌려 책임을 회피할 수 있으니까. 누구 때문에 잘못됐다면 합리화가 되는데 온전히 내 잘못이라고 여겨지면 억울
하기 때문이다.


 

돌이켜 생각해봐도 누가 먼저 연결을 했는지 구분이 명확히 가지 않는다. 어쩜 우리가 짐작 못하는 무의식에서 서로 손을
내밀었는지도 모르겠다. 성냥인지 불씨인지도 모르고 있다가 우연히 부딪쳐 활활 타오르는 불꽃처럼. 열 명도 넘는
남자들 중에 바로 앞에 옆도 아닌 몇 사람을 건너 캔 음료수를 따 달라고 부탁을 했으니, 그것도 처음 만나 소개
하는 자리에서.

지인의 권유로 볼링동호회에 가입하게 되었다. 남자들만 있으니 삭막해서 여자 회원을 모집한다기에 친구 몇 명이랑 선뜻
대답을 했다. 재미도 있고, 무엇보다 운동을 규칙적으로 열심히 할 수 있는 계기가 될 것 같았다. 첫 모임 때 캔 음료수가
잘 따지지 않아 끙끙대다가 무심코 한 남자에게 부탁을 하면서 캔고리가 사랑의 시작이 되었다.


그 순간 그는 갑자기 온 몸이 찌릿했다고 한다. 그렇다고 한 눈에 정신을 잃었다거나 그런건 아니었는데 눈이 마주
치는 순간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어떤 느낌이 왔다고 했다. 나도 왜 하필 그가 눈에 띄었는지 정확히 설명 할 수가 없다.
부탁을 하고 보니 편안한 인상이 눈에 들어 왔다고밖에. 그렇다고 특별한 코드를 연결한 것도 아니었다.

다만 많은 남자들을 두고 캔과 힘들게 씨름 하는게 자존심이 상했다. 여자회원이 몇 명 되지도 않는데 알아서 대접을 해
줬으면 하는 마음도 있었다.


무슨 일이든 처음이 중요하다는 생각을 한다.

새로운 장소에서 처음 앉았던 자리에 계속 앉게 되고 낯선 사람들과의 만남에서도 처음 말을 텄던 사람에게 관심을
가지고 대하는 경우가 많다. 그 후로 그의 손엔 늘 캔 음료수가 두 개 들려 있었고 고리가 따진 상태로 한 개는 내게
돌아 왔다. 팀을 나누어 게임을 할 때도 한편일 때가 많았고 회식을 할 때도 내 옆자리는 그가 차지했다.


언제부턴가는 귀가길에 까지 그림자가 되었다. 캔 고리에 사랑의 잎이 나고 꽃이 필 준비를 하고 있었던 것이다.
우리 부부는 기분이 좋을 때도 나쁠 때도 모든 걸 캔 고리 탓으로 돌린다.

 

 "당신이 공주병이 있어서 캔을 따 달라고 했기에 망정이지 아니면 접근할 엄두도 못 냈을 텐데,
  죽을 때까지 그건 내가 해준다."

 

적당한 취기로 기분이 좋아진 남편의 말이다. 심사가 틀어진 날은 심술궂은 푸념이 이어진다.  캔도 하나 못 따는 여자를
눈독들인 자신이 바보라고, 무안을 주고 말았어야 했다고.  캔 고리를 단숨에 딸 수 없어도 사는 데는 아무 지장이 없는
여자라는걸 보여 주려고 번개 맞은 그의 마음을 보살펴 준다.


때때로 서로 먼저 옆구리를 찌른 것 아니냐고 티격태격하기도 하지만 누가 먼저인들 무슨 상관일까. 잘 자라 꽃이 피고
열매가 맺어 아름다움을 주고 그늘이 되어준다면 잘한 일이 아닌가.

 

백승분/  대구시 달서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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