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건강/맞춤형

정신건강이 무너진 사람들 직장 내 왕따







공자의 한 제자가 물었다. “스승님, 마을의 모든 사람이 어떤 사람을 선하다고 하면 그 사람을 선하다고 믿으면 됩니까?” 공자가 답했다. “좀 생각해봐야지.” 제자가 또 물었다. “그럼, 마을의 모든 사람이 어떤 사람을 악하다고 하면 그는 악할 사람입니까?” 공자가 또 답했다. “그 또한 좀 생각해봐야지.” 그러면서 공자가 덧붙였다. “악한 사람들이 모두 어떤 사람을 악하다고 하고 선한 사람들이 모두 그 사람을 선하다고 하면, 그는 분명 선한 사람이다.”




성숙을 한마디로 정의하기는 어렵다. 개인적으로는 성숙을 관용으로 대체해도 별 무리가 없다는 생각이다. 자신에게는 엄격하고 타인에게는 좀 관용스러운 것, 이게 바로 성숙이 아닐까 싶다. 나이 30이 넘어서도 여전히 자신에게 관대하고 타인에게 엄하다면 우리는 여전히 ‘정신적 미숙아’다. 특히 누군가를 떼를 지어 따돌린다면 ‘집단적 미숙아’에 다름 아니다. 선한 사람, 성숙한 사람은 무리를 짖지 않는다. 더구나 남을 비난하는 무리에는 발을 들여놓지 않는다. 말이 곧 자신의 인격임을 누구보다 잘 아는 까닭이다.





직장은 인생 일정 구간의 대부분을 보내는 삶의 공간이다. 일이 좀 버거워도 행복해야하는 직장인의 터전이다. 직장이 무너지면, 행복이 무너지고, 행복이 무너지면 삶이 무너진다. 그러니 직장은 서로 이해하고, 서로 보듬으며, 서로의 행복을 키워줘야 하는 삶의 무대다. 한데 안타깝게도 직장의 모습이 늘 그렇지만은 않다. ‘왕따 바이러스’가 대표적 악균이다. 만물의 영장, 합리적 동물이라는 인간에게는 묘한 심리가 있다. 누군가를 조직적으로 따돌리면서 그들 스스로 유대감을 형성하려는 심리다. 그러면서 ‘저급의 우리’라는 패거리즘을 짖는다. 그들 스스로는 고상하다고 착각하면서. 그런 점에서 인간은 어쩌면 만물의 영장이 아닌 ‘자잘한 영혼들의 군집체’인지도 모른다.




중국 전국시대 위나라 대신 방공이 조나라에 인질로 가는 태자를 수행하게 되었다. 방공이 떠나면서 왕에게 물었다. “한 사람이 달려와 ‘시장에 호랑이가 나타났다’고 외치면 임금께서는 믿으시겠습니까?” 왕이 말했다. “당연히 믿지 않지.” 방공이 다시 물었다. “그렇다면 두 사람이 함께 나타나서 ‘시장에 호랑이가 나타났다’고 외치면 믿으시겠습니까?” “그래도 믿지 않지.” 방공이 또 물었다. “그럼 다시 세 사람이 와서 이구동성으로 ‘시장에 호랑이가 나타났다’고 외치면 그래도 믿지 않으시겠습니까?” 그러자 왕이 답했다. “그렇다면 믿을 수밖에 없겠지.” 그러자 방공이 말했다. “시장에 호랑이가 나타날 리 없음은 세상 사람이 다 아는 사실입니다. 그렇지만 세 사람이 한 목소리로 호랑이가 나타났다고 하면 호랑이는 나타난 것입니다.” 세 사람이 입을 맞추면 없는 호랑이도 만들어낸다는 삼인성호(三人成虎)가 유래한 고사로, ≪한비자≫에 나오는 얘기다. 방공이 떠나자 왕의 측근들은 한목소리로 방공을 비방했고, 그는 결국 조정에 복귀하지 못했다.





말로 입은 상처는 칼로 입은 상처보다 깊고 오래간다. 말을 흉기로 쓰지 말아야 하는 이유다. 공자는 “군자는 화이부동(和而不同)하고 소인은 동이불화(同而不和)한다”고 했다. 군자는 두루 어울리되 불의에 의기투합하지 않고, 소인은 패거리를 지으면서도 서로 화합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내가, 아니면 우리가 어떤 사람이고 어떤 그룹인지를 이 말에 맞춰보면 대충 어림은 할 수 있지 않을까 싶다.




스스로를 악인이라고 자처하는 사람은 세상에 적다. 보통은 자신이 중간쯤은 된다고 믿고 산다. 그럼 몇 가지를 물어보자. 당신은 누구를 칭찬하는가, 아니면 험집을 들춰내는가. 공(功)을 공평히 나누는가, 아니면 공은 독차지하고 과(過)는 누군가에게 떠넘기는가. 타인의 잘못에 합당한 꾸지람을 하는가, 아니면 화풀이 차원의 비난으로 상처를 주는가. 이(利)와 의(義)가 엇갈리는 지점에서 고민하는가, 아니면 냉큼 이익만을 거머쥐는가. 당신이 주로 만나는 사람은 어떤가. 누군가를 칭찬하며 모임의 온기를 데우는가, 아니면 누군가를 집단으로 헐뜯으며 ‘악의 바이러스’를 퍼뜨리는가. 그러면서 혹여 ‘우리는 한편’이라고 어줍잖은 착각을 하는 건 아닌가.





공자는 인(仁)의 본질을 추기급인(推己及人)으로 봤다. 자기의 마음으로 미뤄 남의 마음을 헤아린다는 얘기다. ‘네가 원하는 않는 것을 남에게 요구하지 마라’는 성경의 말씀과 뜻이 하나다. 누구나 마음이 하나일 수는 없다. 누구는 낙관적이고, 누구는 비관적이다. 누구는 말이 많고, 누구는 말이 적다. 세상에는 무수한 ‘다름’이 있다. 그걸 마음으로 푸근히 받아주는 게 지성이고 품격이다. 때로는 부모를 생각하고, 때로는 자식을 생각하고, 때로는 형제, 때로는 친구를 생각해라. 당신의 행동, 당신의 말을 누군가가 그대로 당신의 부모 자식 형제 친구에게 돌려준다고 생각해봐라. 세상은 돌고돈다. 주는 대로 돌려 받는 게 인생이다. 또 하나. 남의 흠을 들춰내는 것은 당신의 단점으로 남의 단점을 공격하는 일이다. 정신이 무너진 육체만의 건강은 ‘절름발이 건강’이다.




글 / 신동열 한국경제신문 연구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