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서히 시력을 잃게 되는 ‘망막색소변성증’이라는 희귀병에 걸려 시력의 5%만 남아있는 1급 시각장애인 이동우. 삼십대 중반에 병을 선고받고 6년이 지난 지금, 흰 지팡이를 의지해 걷는 그의 발걸음은 그 누구 보다 씩씩하다. 보이지 않는 한 남자의 이야기를 다룬 연극 <Open Your Eyes> 의 주인공으로 종횡무진 무대를 오가는 그는 보이지 않는 눈으로 더 많은 것들을 보고 있다. |
반갑지 않은 손님
‘탁, 탁, 탁탁’ 복도 끝에서 들려오는 소리였다. 소리는 점점 가까워졌고 코너를 돌자 선글라스를 끼고 흰 지팡이를 좌우로 움직이며 개그맨 이동우가 모습을 드러냈다. 20cm 정도 차이가 나는 블록의 높이를 능숙하게 간파하고, 동그랗게 의자가 놓여있는 틈을 비집고 들어와 앉은 이 남자는 굵고 맑은 음성으로 인사를 건넸다. 입가엔 미소를 흠뻑 머금은 채.
신혼의 단꿈에 젖어있던 이동우에게 ‘망막색소 변성증’ 이라는 병명이 선고된 것은 2004년도의 일. 그저 몸이 피곤해서 그러려니 넘어갔던 일들이 점점 심각한 상황이 되고 말았다. 야맹증도 심해져 운전대를 잡는 것조차 두려웠다. 여기저기 부딪치고 넘어져 몸에는 온통 상처뿐이었다. 그러면서도 ‘뭐 별일이야 있겠어’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는데 검사를 마친 의사에게 그가 들을 수 있었던 말은 망막세포에 색소가 끼고 망막이 변해시야가 좁아져 40대 전후에 실명할 수도 있다는 청천벽력과도 같은 말이었다.
“ 우리들끼리 하는 농담인데요, 망막에 이상이 생기면 인생 참 막막해집니다. 처음 그 말을 들었을 때 너무 암담했어요. 그 많고 많은 병명 중에 듣지도 보지도 못한 희귀병에 걸렸다는 것을 받아들이기 힘들었어요. 가장 힘들었던 건 아무런 이유를 찾지 못하는 거였어요. 내 부주의로 머리를 다쳤다면 내 잘못이라고 인정할 수 있는데 그런 경우가 아니었기 때문에 어디다 대고 하소연 할 수가 없더라고요. 답답하고 억울한 감정이 제일 슬픈 감정이라고 하는데요, 너무 억울한 거예요. 잘못한 것도 없는데 왜 내가 이유 없이 이런 병에 걸렸을까. 그런 생각이 온통 머리에 가득 차 있었죠. 그래서 자꾸 바닥으로 바닥으로 가라앉고 있었어요. ”
어느 날 갑자기 나타난 병이 점점 진행되어 종래엔 앞을 볼 수 없을 거라는 말을 받아들이기란 그 누구라도 쉽지 않았을 일이다. 이동우도 그랬다. 하지만 병명을 검색해 보아도 나오는 것이라곤 ‘원인이 밝혀지지 않았다’ 라는 문장과 ‘실명’ 이란 단어뿐이었다. 여기 저기 유명한 병원을 찾아다니며 재차 검사를 해봤지만 결과는 변하지 않았다. 민간요법도 효과가 없었다. 썩은 지푸라기라도 잡고 싶은 심정이었지만, 그 어디에도 잡을 만한 지푸라기가 없었다. 그저 그것이 자신의 운명이라고 받아들이는 일 밖에는 남아있지 않았다.
마음의 눈을 갖게 되다
“ 솔직하게 말씀드리면 제일 밑바닥까지 내려갔기 때문에 용기를 가질 수 있었어요. 사람이 어설프게 바닥을 기면 완전히 내려놓거나 받아들이기가 힘듭니다. 숨이 턱턱 막히는 질식사 직전까지 가봐야 공기의 소중함을 알게 되는 것처럼 말이에요. 더 이상 갈 데가 없고 나중에는 죽을 힘조차 없는 지경에 이르러서 저도 모르게 발을 차고 올라왔던 것 같아요. 스스로 의지를 불태우거나, 이제부터 새로 출발해보자는 동기가 마련돼서가 아니라 더 이상 물러날 곳이 없고 내려갈 곳이 없어서였어요. ”
그래서 지금은 행복 하느냐고 묻자, 이동우는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그럼요.” 하고 명쾌한 대답을 보내준다. 그것은 고통을 자기의 것으로 인정하는 그 순간부터였다.
6년의 시간을 지나오면서 그에게 일어난 이상현상은 앞이 점점 보이지 않는 것만이 아니었다. 눈으로 볼 수 없는 것들을 마음으로 볼 수 있게 된 것이다. 겉모습에 현혹되어 상대의 마음을 볼 수 없었던 예전과는 달리 말이 가진 진정성과 사람들의 인간성을 더 잘 보게 됐다. 마음의 눈을 갖게 된 셈이다. 삶을 긍정적으로 대하는 여유도 생겼다.
“ 사람들은 자신의 인생이 참담할 때 기적을 바라거든요. 전 세계적으로 8천 여 종의 희귀병이 있고, 그 중 우리나라에만 약 3천 여 종이 있는데 그 많은 희귀병 중에서 하나도 안 걸리고 사는 것이 오히려 저는 기적이라고 생각해요. 그러니 무언가 대단한 기적을 바랄 것이 아니라 이 위험천만한 세상에 아무 탈 없이 살고 있다는 것을 기적으로 생각한다면 굳이 행복을 멀리서 찾지 않아도 되겠죠. ”
지팡이 든 남자의 끝없는 도전
그는 지난봄부터 평화방송 라디오 <오늘이 축복입니다>의 진행을 맡아 매일 청취자들과 소통하는 일을 해내고 있다. 그 사이 사이 오랜 준비를 해 왔던 자신의 이야기를 담담하게 기록한 <5%의 기적>을 출판하면서 희망의 메시지를 전달하는 멋진 일 또한 해냈다. 책에는 크레파스 그림으로 지팡이를 들고 서 있는 한 남자가 등장하는데 그의 딸 지우가 자기를 지켜주는 아빠를 ‘수호천사’로 그린 것이다. 누군가에게 천사가 될 수 있다는 건 굉장히 행복한 일이다.
5%의 시력밖에 남아있지 않은 이동우는, 5%나 남아있는 시력으로 라디오를 진행하기 위해, 책을 쓰기 위해 부단한 노력들을 해 왔다. 남들보다 스무 배는 크고 진한 글씨체로 만든 이동우의 대본은 단번에 눈에 띈다. 스튜디오 안에서도 스탠드를 환하게 켜놔야만 글씨를 겨우 볼 수 있을 정도다. 라디오 방송이 끝나자마자 그는 또 바삐 공연장으로 달려간다. 앞이 보이지 않는 남자에 관한 이야기를 연극 무대에 올린 <Open Your Eyes>의 주인공이 되어 관객들과 만나고 있다.
“ 저에겐 또 다른 도전이에요. 동선을 잘 외워서 좌로 몇 보, 우로 몇 보 움직이겠다는 약속 하에 무대에 서기 때문에 겁나거나 두렵진 않아요. 연습 과정을 통해서 충분히 등퇴장구를 익히고 대도구의 위치를 파악했기 때문에 보이지 않는 것이 큰 장애로 다가오지 않습니다. 오히려 보는 분들이 조금 아슬아슬해 하는 느낌이랄까요. ”
이동우는 자신이 이렇게 열정적으로 삶을 살아갈 수 있는 이유로 가족을 들었다. 그리고 그가 분신처럼 들고 다니는 지팡이에 가족을 비유했다.
“ 저는 이 지팡이가 결코 만만하지 않거든요. 왜냐하면 이 지팡이가 없으면 걸음의 속도가 10분의 1로 줄어요. 행여 고무줄이 끊어져 망가지지는 않을까, 누가 가져가지는 않을까, 저에게는 절실한 물건이라 곁에 없으면 불안해지거든요.
애지중지 안하면 무엇이든 금방 망가지듯이 제가 이 지팡이를 소중하게 대하지 않으면 언젠가는 제 손을 아주 멀리 떠날 것 같아요. 가족이란 존재도 마찬가지에요. 내가 신경 쓰고 늘 돌봐야하는 사람들, 내가 아껴주고 사랑해줘야 하는 사람들이 있어 제가 더 열심히 살아갈 수 있는 것 같아요. ”
이동우는 살아있음에 감사하다. 앞이 보이지 않을 것 같은 터널을 지나 새로운 세상을 만난 그. 세상은 그대로인데 그의 마음속에는 많은 변화가 있었다. 자신에게 주어진 삶에 묵묵히 최선을 다해 살아가고 있는 그는 지금 우리들의 유쾌한 희망이 되고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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