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하 글은  아프리카 오지로 머나먼 남미의 산골로 젊은 시절을 온통 다바쳐 인류애를 실천하신 정부파견 의사분들의 감동적인 이야기를 엮어 출판된 "가난한 지구촌 사람들을 사랑한 한국의 슈바이처들" 내용을, 발간 주체인 한국국제협력단(KOICA)의 동의를 얻어 건강천사에서 금요특집으로 소개해 드립니다. 읽는 모든이와 자라나는 청소년에게 감동과 삶에 귀감이 되길 기원합니다.

 

 

 

코트디부아르의 슈바이처  안순구

사랑을 실천한 의사 추장님

 

 

 

 

 

 

 

 

환자 치료를 잘하는 의사가 명의이겠지만,

그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항상 사랑을 실천해야겠다는 마음가짐이 우선이라고 생각하는 의사.


 

진정으로 사랑을 실천한 안순구.

 

 


검은 대륙의 코트디부아르(Cote D'Ivoire) 사람들은 그를 ‘한국의 슈바이처’, 또는 ‘황색 슈바이처’라 칭송하였습니다. 그는 진정으로 아프리카를 사랑하였습니다.


아프리카를 사랑하고 그곳에서 살고 있는 사람들도 사랑하고 좋아합니다.

난 아프리카에 미친 사람이었어요.

 

안순구는 1937년에 태어나, 1962년 가톨릭대학교의대를 졸업하였습니다.

육군 군의관으로 군복무를 마친 그는 1969년 코트디부아르 국립중앙의료원에 정부파견의사로 파견되었습니다. 아비장국립 중앙의료원에서 1년간 열대의학과 프랑스어를 공부한 후, 디보 도립병원을 거쳐 띠아살레도립병원에서 26년간 봉직하다가 1993년 1월 영예로운 정년퇴직을 맞으면서 귀국하였습니다.


1975년 외무부장관 표창, 1997년 수교훈장 숙정장, 1982년 대통령 표창,1985년 코트디부아르 농림부장관 표창, 1994년 KBS해외동포상, 1995년 대한의사협회 표창 등을 수상하였고, 1994년에는 가톨릭대학교 명예의학박사 학위를 수여받았습니다.


 

어머니가 암으로 세상을 떠나는 모습을 보면서, 그는 의사가 되기로 결심하였습니다.

그리고 학생 시절부터 막연히 마음속으로만 생각해 왔던 ‘사랑의 실천’을 하고자 하였습니다.

마침 아프리카 외교의 일환으로 봉사할 의사를 뽑는다는 소식을 듣고 지원서를 냈고, 2~3년 정도를 예상하고 어린 두 딸을 떼어놓고 아내와 함께 아프리카로 떠났습니다.

 

그리고 젊음을 송두리째 바친 31년이라는 시간이 흘렀습니다..........


코트디부아르는 아프리카 서부 기니아만 연안의 나라로서 면적은 한국의 4배입니다.

아프리카에서는 비교적 부유한 나라이지만, 수도를 벗어나면 바로 오지가 펼쳐집니다.

프랑스 식민지로 있다가 1960년 독립하였고, 공용어는 프랑스 어이며, 종교는 이슬람교와 토착신앙이 혼재되어 있습니다.

 

 

1993년 시무식후 병원직원들과 함께

 

 

띠아살레시 도립병원장에 취임하면서 사랑의 실천이 시작되었습니다.
유일한 의사 안순구와 현지 출신 간호사를 포함한 30여 명의 직원 그리고 40여 개의 병상이 고작인 가난한 병원에서 환자를 치료하였습니다.

 

40도를 오르내리는 열대성 기후와 말라리아와 같은 풍토병으로 가족의 건강 위협은 물론, 토착민의 상이한 체질과 열대성 특이체질에 대한 의료지식 이 부족하여 모든 것을 다시 공부해야 했습니다.

특히 언어소통의 장애로 진료에 상당한 어려움이 있었습니다.

프랑스어를 하는 사람은 드물고, 60개의 종족이 서로 다른 토착어를 제각기 사용 하고 있어 타 종족끼리는 말이 통하지 않았습니다.  진료나 회진 때면 통역관 3명을 동반해야 하였고, 환자가 오면 같은 종족의 간호사를 찾아 통역을 부탁해야 했습니다.


병원살림이 열악하여 종종 약품부족으로 치료를 중단할 수밖에 없었는데, 수십 리 먼 길을 찾아와 병원 앞에서 서성이는 수많은 환자들을 그냥 돌려보낼 수 없어 자비를 털어 의약품을 구입하기도 하였습니다.
뼈가 부러지거나 금이 갈 경우 X-Ray를 찍어봐야 하는데, 장비가 없으니 도무지 방법이 없었습니다. 그 나라 관계부처에 몇 번이나 의료지원을 건의하였지만 결과는 언제나 마찬가지였습니다.

 

결국 ‘봉사하러 온 것이지 불평하러 온 것이 아니다.’라고 마음을 다잡고,

주어진 환경 속에서 해결방법을 찾아야 했습니다.

뼈가 부러진 사람들은 며칠 간 입원시켜 놓고 상태를 본 후 그 차이에 따라 조치를 했습니다.

아프리카에 온 이상 아프리카의 법을 따르는 것이 유일한 방법이었습니다.

그의 이러한 노력들을 주민들도 차츰 이해하게 되었고, 의사로서 뿐만 아니라 지역의 어른으로 서도 존경받게 되었습니다.

 

환자들은 말라리아, 피부기생충, 폐렴은 기본이고 원목수송차량들의 교통사고가 빈번해 새벽에 응급환자를 맞거나 한밤중에 왕진가방을 꾸리는 일이 다반사였습니다.

출산에서부터 임종에 이르기까지 남녀노소의 삶과 죽음을 보살피는 일 외에도 아버지 판정, 어린이 나이결정 등 온갖 궂은일을 도맡았으며, 인근 부족을 아우르는 유일한 해결사이기도 했습니다.

 

바우레족과 아베족 사이의 갈등을 풀었던 그는 두 부족의 명예촌장으로 추대되었습니다.


안순구가 치료한 환자의 수는 분기별 1,000명 정도가 예사였고, 예방접종까지 포함하면 2,000명을 훌쩍 넘기기도 하였습니다.

병원 진료활동 이외에 순회 진료를 실시하였는데, 1992년 모무리진료소와 이로보진료소 등지에 월 2회 총 24회의 순회 진료활동으로 2,000여 명의 환자를 살폈습니다.

또 중, 고등학생들에 대하여 AIDS에 대한 예방교육을 실시하였습니다.
때로는 원주민들이 그를 마술사나 신적인 존재로 오해하였습니다.


AIDS 감염률이 10%정도 되는데, 그가 고쳐낼 수 있을 거라며 찾아오는 경우도 있었습니다.

그리고 생명이 얼마나 남아있는지 뻔히 아는데 조금 만 더 살게 해 달라고 애원하는 그들을 볼 때 안타까움은 말로 다 표현할 수 없었습니다.

 

코트디부아르에서 의료비는 무료입니다.

그래서 환자들도 부담 없이 병원을 찾았고, 의사에 대한 신뢰는 절대적이었습니다.

치료를 받다가 죽어도 이의가 없었습니다.

오히려 그처럼 애써주셔서 고맙다는 인사를 하였습니다.

 

이처럼 원주민의 생로병사를 사랑으로 따듯하게 감싸면서 그 들은 의사 안순구를 삶의 주재자처럼 대하였고, 스스럼없이 그를 찾아 자문을 구하였습니다.

학교를 가야겠는데 자신의 나이를 모를 때, 키와 몸무게를 재고 치아의 수를 헤아리는 등 나름대로 검사를 하지만 당사자에게 몇 살이 좋겠느냐고 물어보고, 큰 무리가 없는 한 원하는 나이에서 역산해 생년월일을 정해 주었으며, 처녀가 아이를 낳아도 그를 찾았습니다.

 

사람이 귀한 곳이라 처녀가 아이를 낳았다하면 자신이 아버지라는 사람들이 우르르 몰려왔습니다.

혈액검사를 해주기도 하지만, 산모를 은밀히 불러 누구를 가장 사랑하느냐고 묻고서 아버지를 선택해 주는 현명함도 발휘해 주는 의사추장님이었습니다.

 

 

어머니날 행사에 그날 출산한 산모에게 선물증정

 

환자가 오면 무슨 종족인지, 직업이 무엇인지, 어디가 아파서 왔는지 한눈에 알아볼 수 있는 아버지 같은 존재였습니다.

띠아살레의 대표적인 인물은 그였습니다.

 

그들은 의사추장님을 부를때, ‘띠아살레 안순구’라 부릅니다.

그의 삶은 1994년 KBS 해외동포상을 수상하면서 텔레비전 다큐멘터리로 제작된 바 있는데, 아프리카 체류 25주년을 기념하며 명예추장으로 추대되었던 장면입니다.

 


취임식장에 코트디부아르 국기와 태극기가 나란히 걸렸다.

마을 사람들은 의사선생님을 추장으로 모시게 됐다.

추장을 상징하는 의상이 둘러지고 띠아살레 안순구씨는 의사추장님이 되었다.

같이 어울려 춤을 추고 아프리카 노래가 울려 퍼진다.

아프리카에서 25년의 시간이 안원장에게 남긴 것은 바로 함께 살아간다는 것 아닐까.

피부색이 다르고 풍습이 달라도 서로 마음을 주고받으며 함께 살아간다는 것…….

 

명예추장 추대식에서 원주민들과 어울려 춤을 추고 있는 안순구 [주간조선 95.9.7자]


의사 안순구가 의사추장으로서 아프리카 사람들의 존경과 사랑을 얻은 것은 바로 피부색이 다르고 풍습이 달라도 서로 마음을 주고받으며 함께 살아왔기 때문이었습니다.

그의 소박한 바람인 ‘사랑의 실천’에 따른 보람이었습니다.

열대의 악천후를 비롯한 제반 악조건 속에서 오직 훌륭한 의료인으로서 남겠노라는 다부진 결심 하나로 버텨온 시간들 속에서 아프리카인들의 믿음직한 보호자로 우뚝 서긴 했지만, 그의 마음 한편에는 가장으로서 또한 아버지로서의 아픈 죄책감이 자리하고 있었습니다.


부인과 어린 둘째 딸이 말라리아에 걸려 죽을 고비를 넘기기도 했고, 가족은 본의 아니게 이산가족이 되어야 했습니다. 아프리카에서 지낸지 2년 후에 아이들을 불렀습니다.

스페인 라스팔마스로 마중을 나갔는데, 가슴에 커다란 이름표를 달고 스튜어디스의 손을 꼭 잡은 아이들이 부모도 몰라보고 엄마와 아빠를 찾아야 된다면서 울 때는 가슴이 무너져 내렸습니다.

 

아프리카와 한국 그리고 파리에서 뿔뿔이 흩어져 살아온 탓에 세 딸들 중 첫째와 막내는 1살 때 헤어져 15살이 되어서야 만났습니다. 세 딸 모두 10세 전후해서 한국과 프랑스에서 교육을 받았고, 10년에 한 번 만날 수 있었습니다.

 

어른이 되어서 아기를 낳으면 절대로 자식과 떨어져 지내지 않겠다고...

매일 일기에 써 부부를 울렸던

세 딸은 이제는 ‘부모님을 존경하고 너무나 자랑스럽다.’고 하였습니다.

 

의사 안순구가 코트디부아르 띠아살레를 떠나던 날. 마치 혈육의 생이별인양 눈물바다를 이루었습니다.

바리바리 선물을 싸들고 온 원주민들은 그를 에워싸고서 눈물을 흘렸습니다.

모든 일을 기쁘게만 받아들여 장례식에서조차 춤추고 노래하던 그들에게 안순구는 사랑 그 이상이었습니다.

울면서 매달리는 원주민들에게 ‘이젠 세 딸과 함께 살게 해 달라.’고 설득하였습니다.

하지만 귀국 도중 비행기 안에서 아내 의 손을 잡고 내내 아쉬움에 눈물을 흘렸던 그였습니다.
아베족의 노래를 들으며 아프리카식 죽음을 맞고 싶다던 안순구는 다 음 세상에 태어나도 꼭 다시 아프리카로 가고 싶다고 합니다.


일산 신도시에 그림 같은 하얀 돌담집.
31년 만에 돌아와 자리 잡은 보금자리.
안순구는 열대의학과 법률, 상식 등을 잘 몰라 고생했던 경험을 바탕으로 아프리카 가이드를 정리하였습니다.
이제 안순구는 평범한 시민으로서 한국의 도시생활을 하고 있지만,

프리카가 환청처럼 늘 그를 부르고 있습니다.


 

맨발로 몇 십리 병원을 찾던 원주민이 몹시도 그립네요.
한 달이 지난 지금도 현관 소리가 나면 원주민 환자들이 병원 문을 두드리는 것 같습니다.

눈에 선해요. 호롱불 하나 들고 새벽 3~4시부터 몇 십리 길을 달려와

아픈 아이를 절절한 눈으로 내맡기던 원주민들이 뇌리를 떠나지 않아요

 

 

아비잔 한인교회 입원환자 위문

 

 

 

출처  가난한 지구촌 사람들을 사랑한 한국의 슈바이처들 / 한국국제협력단(KOIC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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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국민건강보험공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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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바닐라로맨스 2011.06.17 10:08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앗! 첫 한국인 추장님의 탄생인가요!?
    정말 멋지십니다~

  2. 풀칠아비 2011.06.17 12:00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사랑을 몸으로 실천하신 분을 또 한분 뵙고 갑니다.
    아낌없는 박수 보내드립니다.
    한 주 마무리 잘 하시고, 행복한 주말 보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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